김현식

낙타 2007. 12. 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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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을 좋아한다. 나는 그가 죽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를 알았다. 그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가 사라졌음을.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처음으로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이란 걸 해본 날이었다. 아홉시 반이 조금 넘어 집에 도착했는데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지나 TV를 켰는데 어떤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RNA라는 제목의 드라마였는데 지금은 그것이 공포물이었고 배두나와 김원준이 출연했었다는 정도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또 기억에 남는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그 드라마에서 나온 노래다. 지금 생각해보면 워낙 유명한 노래라 그 전에도 들어봤을 법한데 기억에 의하면 내가 그 노래를 들은 건 그 때가 처음이다. 비처럼 음악처럼 이라는 노래다. 나는 그 노래가 너무 좋아 인터넷으로 그 노래에 대해 알아보았고 그 곡을 부른 가수가 김현식이며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점이 내가 그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만든 것 같다. 사람은 가고 그 목소리만이 남아 듣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불어 일으키는 현상에서 나는 일종의 신비감을 느꼈다. 이는 나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김광석이나 유재하도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추모하는 것이고 Jeff Buckley는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전설이 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Nirvana와 Pearl jam의 경우를 보면 이런 현상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Nirvana와 Pearl jam은 둘다 1990년대 초에 Alternative Rock이라는 장르의 음악으로 미국 대중음악계를 선도하던 락그룹이다. 그 당시에는 두 그룹이 비슷한 정도의 인기몰이를 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Nirvana가 훨씬 더 많이 기억되고 재조명 되곤 한다. 이는 Nirvana의 리더 Kurt Cobein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는 이문세도 좋아한다. 이문세는 지금도 살아있는 가수다. 김현식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이문세와 비슷한 나이일 것이다. 나에게 이문세의 이미지는 양화이고 김현식의 이미지는 음화인데 이는 그들의 삶과 음악의 스타일에서 기인한 바도 있지만 그 보다 그들의 생사여부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나에게는 양화보다 음화가 더 깊고 큰 의미를 갖는다. 양화는 따스한 햇살과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떠오르게 하는 반면 음화는 텅빈 방과 어둠,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게끔 만든다.

알고보니 김현식은 처음 생각했던 것 보다 꽤 유명한 가수였다. 내사랑내곁에 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들어서 익히 알고 있던 노래였고 사랑사랑사랑 과 봄여름가을겨울 도 예전에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또 전에 어떤 단편 드라마에서, 난치병을 선고받고 병원에 입원중인 어떤 가수가 음악에 대한 열정이 너무 강해 몰래 병원에서 탈출해서 공연을 하고, 그러기를 반복하다 몸 상태가 악화돼 결국 생을 마감한, 그런 이야기를 본 기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김현식의 이야기였음도 알게 되었다.

나는 김현식의 거의 모든 노래를 찾아 들었는데 하나같이 내 마음을 울렸다. 그의 노래는 슬프다. 나는 그 슬픔이 좋았다. 그것은 마음 속 아주 깊숙이 있는 어떤 응어리를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김현식의 목소리는 전인권과 비슷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 둘의 목소리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는데, 들었을 때 김현식의 목소리는 거칠면서도 그윽함을 가지고 있으며 전인권의 것보다 더 큰 '한'이 담겨있는 것 같다. 그 '한'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잘 부합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고 오늘 날까지도 그가 추모되고 있으며 그의 노래가 리메이크 되어 다시 불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담겨있는 노래가 좋다. 일전에 박진영이 모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사람들이 그의 음악에 민족적 정서가 부족하다고 지적한 데 대해 비판하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사람들의 지적에 따라 자신의 음악에 국악을 크로스오버하는 등 민족적 색채를 담아보려 노력해 봤지만 이상한 음악만 만들어졌고 그런 노력이 결국 허사였다고 말했다. 자신의 음악은 미국 스타일이고 음악은 각각 저마다의 특성이 있으니 대중들이 자신의 그런 특성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또 굳이 자신의 음악이 아니어도 한국적 특색을 가진 음악은 많으니 꼭 자신에게 그런 요구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것 이 그의 발언의 요지였다. 꽤 일리있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말에 동감하지 않는다. 그는 '민족' 정서 내지 '한국적'이란 말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음악에서 우리 민족의 정서라고 할 때 그것이 꼭 국악이나 판소리에서 느껴지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우리 민족의 정서에 대해서 분석한 바 있는데 그들의 의견을 '한'이라는 단어 하나로 축약해도 크게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악에서 인간 내면의 '한' 내지 억압에 대한 저항이 느껴진다면 나는 그 음악에 우리 민족의 정서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나오는 발라드 음악에서도 그것이 느껴지고 홍대 클럽에서 공연되는 인디밴드들의 펑크나 하드코어 음악에서도 그것이 느껴진다. 누군가 박진영에게 그의 음악에 한국적 색채가 부족하다고 지적했을 때 그것은 그의 음악의 음계나 쓰이는 악기 또는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한 게 아니라 음악의 주제와 깊이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김현식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울분과 깊은 곳에서 비롯된 슬픔이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부르는 노래는 그것이 어떤 형식이든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동경하면 그 사람을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김현식을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마침 우리 집에는 기타가 있었는데 오랫동안 아무도 사용하거나 손보지 않아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강좌나 악보들을 보며 기타를 연습했는데 원체 기타도 좋지 않은데다가 옆에서 봐주는 사람이 없으니 진도가 나가지를 않았다. 김현식을 좋아하고 따라하고 싶은 마음은 강했지만 나의 의지력과 집중력이 약한 탓인지 기타를 익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학원을 한 달 정도 다녀보기도 했지만 내가 너무 게으름을 좋아하기도 해서 지금까지도 나의 기타 실력은 기본적인 코드나 몇 개 짚을 줄 아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못치는 실력으로나마 기타로 반주를 하며 김현식의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김현식의 수기를 읽어보면 그가 방황하던 시절에 돈이 부족해 길거리에서 어린 아이들을 위협해 돈을 빼앗기도 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나는 김현식을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그의 그런 범죄 행위까지도 멋있게 보았고 나도 그런 깡패짓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얼핏 들었다. 물론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여하간 나는 여기서 내가 그가 한 행동이라면 그것이 범죄일지라도 동경할 만큼 그를 좋아했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최근에 김현식의 노래가 많이 리메이크 되었다. 누군가의 정규 음반에 수록되기도 하고 컴필레이션 형식으로 그의 리메이크 음반이 발매되기도 하였다. 김현식이 죽고 나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좋은 일이지만 이상하게 나의 심술궂음이 발현된다. 가끔 김현식을 나만 알고 좋아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일종의 소유욕에서 비롯된 마음일까. 나는 그것을 심술궂음이라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때로는 리메이크가 원곡의 진가를 떨어뜨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감도 든다. 나에게는 그 어떤 리메이크 곡도 그가 부른 원곡보다는 못하게 들린다. 아무리 더 세련되게 편곡되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김현식의 인생은 술과 음악을 떼어놓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는 지독히도 술과 음악에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술을 너무나 많이 마신 탓에 건강이 악화돼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으며 죽기 직전까지도 혼신의 힘으로 노래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이끌었을까. 자신의 생명이 거의 다 닳았음을 알면서도 끝까지 음악과 술에 대한 집념을 놓지 않았던 그의 삶은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불 속으로 날아드는 불나방을 연상케 한다. 지독한 외로움이 그를 그렇게 이끌었을까. 아니면 가정의 불화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가 그보다 더 원초적인 문제 때문에 끊임없이 고뇌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은 태초이래 계속 이어져 온, 인간의 본질과 존재의 근원에 대한 고민이리라. 어쩌면 사람이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답은 신의 영역에 있을 듯 하다. 문제는 그에 대한 고민을 얼마나 하는가 하는, 저마다의 고민의 정도에 있다. 김현식의 고민은 너무나 커서 고민이라기 보다 고뇌였고 그 때문에 그의 마음은 늘 괴로웠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끝없이 노래하고 음악을 만들었으며 마음의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매일 술을 마셨다. 그러나 그러는 것이 그의 고뇌를 지워주지는 못했다.
신체 어느 부위가 몹시 가려운데 이상하게도 도저히 그 정확한 부위를 찾아낼 수 없을 때가 있다. 가렵다고 생각되는 곳을 찾아서 긁어도 전혀 시원하지가 않다. 이곳저곳 긁어보다가 가려운 곳을 찾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 가려움이 견딜 수 없을 정도에 이르면 문제는 심각하다. 가려운 곳을 긁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가 없어 어딘가를 계속 긁는데 피가 나도록 긁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김현식은 자신의 괴로움을 음악과 술로써 달래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운명은 술과 음악 외에 다른 것을 그에게 제시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이 자신의 괴로움을 달래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어 술과 음악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 때문에 자신의 몸이 망가지고 있음을, 죽음이 앞당겨져 옴을 알면서도.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조금 미심쩍은 면도 있다. 김현식이 기독교 신자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독실했는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는 분명 기독교 신자였다. 그가 쓴 시 중에는 하나님께 고백하는 내용의 글도 있다. 얼핏 생각했을 때 그와 기독교는 참 어울리지 않는다. 술과 어둠을 그렇게나 좋아한 사람이 기독교 신자였다니.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여기서 고백하건데 내가 교회에 다니게 된 데에는 김현식의 영향이 컸다(지금은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이 글을 쓸 당시에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그가 교회에 다녔다고 하니 교회가 어떤 곳인지 궁금한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대학교 일학년 때 처음-엄밀히 처음은 아니다. 국민학교 시절에 별다른 인식없이 주위 분위기에 이끌려 한 동안 교회에 다닌 적이 있다-으로 교회에 갔고 지금까지도 다니고 있다-그러나 그 이유가 전적으로 김현식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밝히지는 않지만 다른 더 큰 이유도 있었다. 어쨌든 김현식이 나에게 큰 영향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김현식이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다녔는지, 어떤 신앙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는 교회를 통해 어떤 경험을 했을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것과 비슷했을까.

어둠그별빛, 밤의고독에서, 도시의밤, 넋두리, 슬퍼하지말아요, 눈내리던겨울 밤, 떠나가버렸네, 한국사람, 그리고 그 외에 지금 머릿 속을 스쳐가는 여러 곡 들. 김현식은 어둠과 외로움에 관한 노래를 많이 했다. 그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고독한 사람을 위로했었다. 아니, '했었다'라는 표현은 잘못되었다. 그의 음악과 목소리는 지금까지도 남아 많은 고독한 이들을 위로하고 있으며 나도 그 위로받는 이들 중 한 사람이다. 나는 사춘기 시절을 그와 함께 했고,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이 글을 통해 고백한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행여나 김현식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이 글을 읽었을 때 불쾌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Posted by ma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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