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쓸모

성냥 2017. 3. 26. 00:31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 말에 반대한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매우 위험한 말이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 쓸모는 누구를 또는 무엇을 위한 쓸모일까. 크게는 국가나 사회, 또는 인류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작게는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 조직이나 회사, 또는 가족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임마누엘 칸트가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일 지라도. 내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나를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으로 취급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서로 충돌한다.


위 두 가지 명제의 충돌에 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를 선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후자를 떼어 놓고, 즉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완전히 배제하고 전자만을 놓고 본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꽤 그럴듯 하다. 다른 명제와 나란히 놓고 보면 문제가 있음이 드러나는 명제가, 독립적으로 떼어 놓았을 때 그럴듯 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세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사실 나는 사람이 하는 모든 생각은 세뇌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는 매우 복잡미묘한 문제이고 이 글의 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이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와 방법으로 세뇌가 이루어져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이유에 의한 것인지, 또는 어떠한 목적을 위한 것인지는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뒤집어 보면 된다. 즉, 사람을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 내지는 이용하기 위하여 그러한 세뇌가 이루어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또는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하는가. 대체적으로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회사나 조직, 또는 국가를 위한 수단이 된다(가족을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이는 다른 것들과는 좀 다른 문제가 된다. 기꺼이 가족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꽤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족에 관한 이러한 문제 역시 매우 복잡미묘한 문제이고 이는 이 글의 줄기와는 걸맞지 않는 논의이므로 더 이상 논하지는 않겠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구조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이에 대하여 큰 저항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알게 모르게, 자연스럽게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세뇌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국가나 사회 또는 조직은 추상적인 존재이다. 개개인의 사람들처럼 구체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국가나 사회 또는 조직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수단이 되도록 하는 방향으로 세뇌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추상적인 국가나 사회 또는 조직으로 인하여 커다란 이익을 얻는 소수의 구체적인 개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국가와 사회 위에 군림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국가 또는 사회를 매개로 다수의 사람들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수의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보편화될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의 방향성을 조정하거나 이를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유도한다. 그들에게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


앞에서 나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세뇌가 이루어져 왔는지는 잘 모른다고 하였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이를 추론해 볼 수는 있다. 애국심과 성실함, 정직함, 직업에 대한 소명감 등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의 분위기,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가를 높게 대우해 주는 풍토, 인내심과 순종심이 있어야 잘 적응할 수 있는 학교생활과 조직생활의 모습 등에서 세뇌가 이루어져 온 방식을 조금씩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언뜻 생각하면, 사람을 많이 존중하여야 한다,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면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냥 친절하게 잘 해주면 되는 것일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명제의 방향성이다. 사람은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외부를 향한 것일 수도 있고 내부를 향한 것일 수도 있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나 자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일단 이것이 먼저 해결되어야 다른 사람에 대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내 삶의 목적을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 나는 고(故) 신해철이 했던 말에 크게 공감한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 이미 그 목적을 이룬 것이다. 남은 인생은 덤으로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즐기면서 살면 된다.


기분 좋고 호방한 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정말 쉽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한데 어떻게 인생을 즐길 수 있겠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겉보기에 거의 동일한 삶을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내면에 어떠한 생각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존엄하다. 그 쓸모를 따질 수 없고 따져서는 안 된다. 사람은 그 자체로 어떠한 목적이다. 그런데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미 그 목적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할 일은 남은 삶을 즐기는 것뿐이다. 나는 우리네 삶은 그 자체로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ma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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