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17.06.20 이 또한 지나갈까
  2. 2017.04.02 연애하지 않을 자유에 관하여
  3. 2017.03.26 2017 3 26 1
  4. 2017.03.26 나의 쓸모
  5. 2017.03.24 2017 3 23
  6. 2017.03.14 제목 없음
  7. 2017.03.12 고통은 ..
  8. 2017.03.12 소녀
  9. 2017.03.12 청춘
  10. 2009.11.28 윤에게 - 예의에 관한 생각

이 또한 지나갈까

성냥 2017. 6. 20. 00:18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기가 조심스럽다.

누군가에게는 절절하게 와 닿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 말로부터 큰 위로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감히 마음에 안 드네 어쩌네 할 처지가 될까.

그래도 나는 오래 전부터 꾸준히 이 말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나의 이 의문을 고백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누군가가 꿈에 그리던 곳으로 여행을 갔다.

그곳은 그가 상상했던 것과 다소 다르기는 했지만, 그는 그곳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리 길지는 않은 여행이지만, 그는 여행을 충분히 즐기고 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건 어쩐지 이상하다.

여행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어떤 이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여행이라고.

우리의 삶이 여행인데, 삶이 지나가야 할 그 무엇이 되어야 할까.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견디고, 버티는 것이 인생일까.

그렇다면 이건 너무 이상하고 부당하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존재하게 되었고, 자신이 정하지 않은 이름을 부여받고,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꽤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우리는 경주를 하듯이 살면서, 그저 이 시기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견디고 버텨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인생의 본연이라면, 나는 너무도 억울할 것 같다.


그래도 지금 큰 고통에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말이 큰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보다는, 고통을 그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그 무엇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고통에 어떤 깊은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의미를 남기는 것이면 좋겠다.

기왕이면 아름다운 어떤 것으로 승화되었으면 좋겠다.


조금 더 솔직한 것을 말해보면, 나의 경우 고통에 직면했을 때, 고통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면 오히려 고통이 더 커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실용적인 측면에서의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가 아무런 소용이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쩐지 미안하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나는 고통이 지나가야 할 어떤 것이 되기 보다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간절하게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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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하지 않을 자유'라는 제목의 책이 있는 것으로 안다.

나에게는 과연 연애하지 않을 자유가 있을까.

나는 조금 고민해 보다가, 이는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가 현재 연애를 하고 있지 않다고 하여, 그가 연애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연애를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연애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욕구불만을 겪고 있는 좋지 못한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연애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첫번째 조건만 갖추면 그로써 곧 연애하지 않을 자유를 얻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걸로 끝은 아닌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에 대하여는, 연애(및/또는 결혼)를 해야한다는 가족(과 주변 사람) 및(/또는) 사회로부터의 유무언의 압력이 있다.

이와 같은 압력에 맞서는 일은 생각보다 녹록하지 않다.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가 정해 놓은 틀 안에서, 사회와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부응에까지 이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의 영향력을 늘상 받으면서 살아간다.

정규교육을 받고,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출산과 양육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삶의 기본적인 틀이 우리 사회에 확고하게 존재한다.

'이러한 사회적 틀을 인식하고 이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이 말은 맞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저항한다는 것은, 아직 그 대상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만일 연애(나아가서 결혼까지)를 하여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에 대하여 저항감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되었든 나는 결국은 그러한 사회적 기대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애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기 위한 두번째 조건은, 가족이나 사회의 기대 및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두번째 조건에 관한 나의 상황을 이야기해 보면, 나는 사회의 기대 및 압력으로부터는 자유로우나 가족의 기대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즉 나는, 내가 연애를 하고 나아가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져야 한다는 부모님의 기대를 쉽사리 외면할 수는 없다.

다만 부모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또는 사회의 기대나 압력으로부터는 나는 매우 자유로운 편이다.


첫번째 조건, 즉 내가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면, 어쩌면 한시적일 수도 있지만, 나는 거의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다정하고 아름다운 연인이나 부부를 보았을 때 나는 전혀 부러움을 느끼지 않고 마음에 어떠한 동요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가 눈에 띄는 연인이나 부부를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이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들이면서 살아갈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이미 자신이 처하게 된 연애 또는 결혼이라는 상황을 애써 미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그들은 연인 또는 부부라는 자신들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노력까지 할 것이다.

이것은 서로 간의 사랑의 형태나 정도가 어떠한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진짜 서로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어려움도 많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느끼거나 얻을 수 있는 감정은 사랑스러움, 즐거움, 기쁨, 행복 등 긍정적인 감정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한다.

그러나 대체로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느끼거나 얻을 수 있는 감정은 다수가 걱정, 슬픔, 분노, 안쓰러움 등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감정들이다.


종합해 보면, 나는 대체로 연애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이것이 한시적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연애는 생각보다는 감정의 문제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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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26

성냥 2017. 3. 26. 23:28

어젯밤 소주를 조금 마시고, 새벽 한시가 조금 넘어서 잠이 든 걸로 기억한다. '나의 쓸모'라는 제목으로 적은 짧은 글은 술기운 속에서 적은 글이다. 그런데 뜻밖에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나는 일곱시가 조금 넘었을 때 비교적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이 맑은 정신상태와 좋은 컨디션으로 무엇을 할 지를 잠깐 고민했다. 평소의 습관대로였다면 티브이를 틀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좋은 상태로 티브이를 보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고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독일어를 공부했다. 즉, 나는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독일어를 공부한 것이다. 공부가 꽤 잘 되었지만, 나는 곧 배가 고파졌다. 컵라면과 어제 먹다 남은 치킨을 먹었다. 아침부터 컵라면과 치킨이라니. 나는 티브이를 보면서 컵라면과 치킨을 먹었는데, 무슨 프로를 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말이다.


낮에는 잠깐 카페에 다녀왔다. 어제 스웨터만 입고 밖에 나갔다가 너무 추워서 금방 다시 들어와 패딩을 입었던 기억이 있어서, 나는 오늘은 처음부터 겨울용 패딩을 입고 나갔다. 그래도 날씨는 꽤나 쌀쌀했다. 내가 유난히 추위에 약해서 그런 것일까. 밖에는 봄옷이나 얇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추울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들의 옷차림은 3월 끝무렵이라는 시기의 옷차림으로서 적절해 보이기는 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제 곧 4월이라고 하더라도, 추우면 따뜻하게 입어야 하는 것 아닐까. 즉, 옷을 입음에 있어 기분보다는 실리를 따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 그들은 이상하게 따뜻한 날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날이 한겨울에 속한 날이었다면 유행하는 롱패딩을 입고 다녔을 것이다.


나는 종종 혼자 카페에 가서 책을 읽거나 독일어 공부를 한다. 그러다가 나는 카페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한다. 물론 대놓고 관찰하는 것은 아니고, 거의 티가 나지 않는 노련한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나처럼 카페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반면, 카페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많다. 외국어 공부나 전공과목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보다는 공무원 시험 등 취업을 위한 시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가끔은 수능 공부를 하는 고등학생들도 있다. 요즘은 노트북을 들고 와서 자소서를 쓰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다들 치열하게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내가 그러한 치열한 상황에서 벗어나 있음에 안도감을 느낄 때도 있다.


물론 카페에는 대화를 하거나 수다를 떨기 위해 짝을 지어 오거나 끼리끼리 오는 사람들도 많다. 연인 사이이거나 썸남썸녀 사이로 보이는 일행들도 많은데, 그들의 대화 내용은 대체로 잘 들리지도 않고, 들었다고 하더라도 거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 대개 남자들끼리의 수다나 여자들끼리의 대화가 귀에 잘 들어온다. 남자들끼리의 대화 내용은 주로 취업 문제에 관한 것이 많다. 느낌상 9할 정도가 그런 것 같다. 여자들끼리의 대화 내용은 역시 취업 문제에 관한 것이 많다. 그런데 9할까지는 아니고 3, 4할 정도가 그런 것 같다. 또한 여자들끼리의 대화 내용은 남자에 관한 것이 많다. 역시 3, 4할 정도가 그런 것 같다. 여기서 그럼 남자들끼리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는데, 결론을 말하면 카페에 오는 남자들끼리는 거의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주관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므로 보편적인 경향이 그러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내가 주관적으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카페에 온 여자들끼리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개중에는 꽤 수위가 쎈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 분도 있다. 예를 들면 남자와의 스킨쉽에 관한 이야기인데, 역시나 그런 얘기는 내 귀에 쏙쏙 들어온다.


카페에 다녀온 나는 잠깐 낮잠을 잤다. 어렸을 적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큰 공허감 내지는 두려움을 느끼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느낌은 너무나 강렬했다. 아마 그것은 기억이 없는 영아 시절에 있었던, 잠에서 깼을 때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것을 알게 되면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어떠한 생존 본능에 따른 습성이 이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또는 전생의 끝무렵에 내가 느꼈던 감정이 그 순간 되살아난 것일 수도 있다는 상상도 해 보았다. 요즘도 가끔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물론 그 정도는 어렸을 적의 그것보다 훨씬 작고 미약하게 남은 여운 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주 오래전에 경험했던 그 공허감을 주로 후각적인 느낌으로 느낀다. 오늘도 낮잠에서 깼을 때 아주 살짝 그 느낌을 냄새 맡았다. 그리고 나는 일요일 오후가 지나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은 일요일 밤이다. 예전에는, 직장생활을 할 때에는, 일요일 밤에 우울함이나 슬픔을 느낄 때가 많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후에 잠깐 맛보았던 공허감도 아름다움 속에 놓아둘 수 있다. 일요일 밤은 더욱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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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쓸모

성냥 2017. 3. 26. 00:31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 말에 반대한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매우 위험한 말이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 쓸모는 누구를 또는 무엇을 위한 쓸모일까. 크게는 국가나 사회, 또는 인류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작게는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 조직이나 회사, 또는 가족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임마누엘 칸트가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일 지라도. 내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나를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으로 취급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서로 충돌한다.


위 두 가지 명제의 충돌에 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를 선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후자를 떼어 놓고, 즉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완전히 배제하고 전자만을 놓고 본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꽤 그럴듯 하다. 다른 명제와 나란히 놓고 보면 문제가 있음이 드러나는 명제가, 독립적으로 떼어 놓았을 때 그럴듯 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세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사실 나는 사람이 하는 모든 생각은 세뇌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는 매우 복잡미묘한 문제이고 이 글의 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이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와 방법으로 세뇌가 이루어져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이유에 의한 것인지, 또는 어떠한 목적을 위한 것인지는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뒤집어 보면 된다. 즉, 사람을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 내지는 이용하기 위하여 그러한 세뇌가 이루어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또는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하는가. 대체적으로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회사나 조직, 또는 국가를 위한 수단이 된다(가족을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이는 다른 것들과는 좀 다른 문제가 된다. 기꺼이 가족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꽤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족에 관한 이러한 문제 역시 매우 복잡미묘한 문제이고 이는 이 글의 줄기와는 걸맞지 않는 논의이므로 더 이상 논하지는 않겠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구조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이에 대하여 큰 저항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알게 모르게, 자연스럽게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세뇌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국가나 사회 또는 조직은 추상적인 존재이다. 개개인의 사람들처럼 구체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국가나 사회 또는 조직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수단이 되도록 하는 방향으로 세뇌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추상적인 국가나 사회 또는 조직으로 인하여 커다란 이익을 얻는 소수의 구체적인 개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국가와 사회 위에 군림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국가 또는 사회를 매개로 다수의 사람들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수의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보편화될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의 방향성을 조정하거나 이를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유도한다. 그들에게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


앞에서 나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세뇌가 이루어져 왔는지는 잘 모른다고 하였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이를 추론해 볼 수는 있다. 애국심과 성실함, 정직함, 직업에 대한 소명감 등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의 분위기,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가를 높게 대우해 주는 풍토, 인내심과 순종심이 있어야 잘 적응할 수 있는 학교생활과 조직생활의 모습 등에서 세뇌가 이루어져 온 방식을 조금씩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언뜻 생각하면, 사람을 많이 존중하여야 한다,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면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냥 친절하게 잘 해주면 되는 것일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명제의 방향성이다. 사람은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외부를 향한 것일 수도 있고 내부를 향한 것일 수도 있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나 자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일단 이것이 먼저 해결되어야 다른 사람에 대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내 삶의 목적을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 나는 고(故) 신해철이 했던 말에 크게 공감한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 이미 그 목적을 이룬 것이다. 남은 인생은 덤으로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즐기면서 살면 된다.


기분 좋고 호방한 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정말 쉽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한데 어떻게 인생을 즐길 수 있겠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겉보기에 거의 동일한 삶을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내면에 어떠한 생각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존엄하다. 그 쓸모를 따질 수 없고 따져서는 안 된다. 사람은 그 자체로 어떠한 목적이다. 그런데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미 그 목적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할 일은 남은 삶을 즐기는 것뿐이다. 나는 우리네 삶은 그 자체로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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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23

성냥 2017. 3. 24. 00:32

낮에 봄햇살을 맞으면서 좋은 기분을 느꼈고, 그 느낌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공책에 짧은 글을 적어보았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내가 쓸 수 있는 단어와 표현이 퍽 적다는 것이었다. 내가 읽어서 그 뜻을 안다고 하여 그 단어가 나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나는 책을 읽다가 '꾸덕꾸덕'이라는 말을 보면 그 뜻을 안다. 그렇지만 글을 쓸 때 나는 '꾸덕꾸덕'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 그것은 아직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순간부터 '꾸덕꾸덕'은 나의 것이 된다. 이제부터는 글을 쓸 때도 그것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열린 사람과 닫힌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는 열린 사람이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닫힌 사람이 된다.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여 꼭 그 사람에 대하여 열린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고, 우연히 한 번 본 사람이라고 하여 꼭 그 사람에 대하여 닫힌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에 대하여도 닫힌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우연히 한 번 만난 사람에 대하여도 열린 사람이 될 수 있다. 마음 속 깊숙이 있는 빗장을 여는 일은 나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는 방법과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나는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열린 사람이 되고 싶다. 가끔 내가 닫힌 사람으로 있을 수밖에 없음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다. 많은 경우,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도 나는 여전히 닫힌 사람인 채로 존재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식의 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틀로만 사람을 분류하고 판단하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모두가 닫힌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을 분류하고 판단하려 한다. 내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나에게 열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마음을 썼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앞으로는 내 주변 사람들이 열린 사람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노력해야겠다, 뭐 이런 류의 교훈적인 말을 하려는 건 절대로 아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내 마음 하나 추스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아주 가끔, 아주 우연스럽게 누군가에 대하여 열린 사람이 된다. 그때 나는 매우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꾸덕꾸덕 마른 땅 위에 촉촉하면서도 시원하게 단비가 내리는 듯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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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없음

성냥 2017. 3. 14. 00:01

글에 제목을 붙이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제목 없음'이라는 제목을 붙여 본다.

이것이 제목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컨디션이 좋을 때 글을 쓰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하니까 도통 글을 쓸 수가 없다.

집중하기 좋은 고요한 주변상태를 만들어 놓고 글을 쓰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하니까 도통 글을 쓸 수가 없다.

좋은 글을 쓰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하니까 도통 글을 쓸 수가 없다.


지금 나는 너덜너덜 피곤한 상태이고, 앞에는 티브이를 틀어 놓고 있고, 좋은 글을 쓸 생각도 없다.

무언가 표현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자신은 없다.

그것은 아주 미묘하고 민감한 것이라, 여간해서는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

지금까지는 서설이었고,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계절이 바뀜을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느끼면서, 나는 불현듯 불안감을 떠올렸다.

나에게는 지난 계절의 평온이 있었다.

겨울 속에서 나는 아주 안정되어 있었다.

그 상태가 계속되기를 바랐다.

나는 아주 보수적이었다.

관성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싶었다.


봄을 느끼면서 나는 흔들림을 느낀다.

겨울의 마음으로는 쉬이 봄을 살아갈 수 없음을 안다.

새롭게 봄의 마음을 심고 물주어 싹을 틔우고 잘 자라도록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

나는 봄의 평온을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또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오겠지.

나는 여름 앞에서 또 불안을 마주하겠지.

나는 가까스로 여름의 평온을 맞이하겠지.

그런데 또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겠지.

나는 가을 앞에서 또 불안을 마주하다가 가까스로 가을의 평온을 맞이하겠지.

그런데 또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오고, 나는 겨울 앞에서 또 불안을 마주하다가 가까스로 겨울의 평온을 맞이하겠지.

그리고 또 봄이 오겠지.


사실 내가 느낀 것은 설렘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설렘을 느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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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

성냥 2017. 3. 12. 16:43

예전에 적었던 글입니다.


고통은 좋은 것이다. 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지만, 고통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라는 정도로는 생각한다. 고통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심해지기도 하는 이유는 고통을 나쁜 것이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빨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고통에 빠져 있는 자신의 상황을 나쁜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 일단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면, 역설적이게도 점점 더 고통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고통은 사라진다. 그러나 그 순간의 고통이 너무 크면, 시간이 흐르기 전에 그 고통으로 인하여 삶이 끝날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고통의 정도를 생각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거나 그러한 생각을 버리고 먼저 그 고통을 온전하게 받아 들여야 고통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에게 직면한 고통을 정면에서 응시하기는 누군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에게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차선책을 생각하여야 하는데, 나에게 그 차선책은 고통을 그리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이다. 나는 일단 나에게 찾아온 이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것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겠고, 또 이것을 없애고 싶어 어설프게 건드려본 결과 이것이 오히려 더 크고 견고해졌다.


나는 고통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므로, 우회적으로 고통을 끌어안고 있는 나의 상황을 약간 먼 거리에서 바라보듯 인식하기로 하였고, 그러한 나의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로 하였다.


고통에 빠져 있는 나의 상황은 그리 좋지도 않지만, 나쁘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고, 또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의 이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나는 미래에 또 이와 유사한 고통에 빠질 것이고, 나는 분명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을 것이다. 나의 삶에서 때때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일어날 이러한 상황을, 나는 나의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의 이 커다랗고 정체불명인 고통을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고통에 빠져 있는 나를 스스로 좋아할 수는 있다. 고통이야 커지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겠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는 별개이다.


2015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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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성냥 2017. 3. 12. 16:28

글이 아니라면. 그림이나 음악이라면.
나는 어떤 표현을 할까.
어떤 화가가 그린 소녀의 옆모습을 좋아한다.
시간이 흘러야 생기는 깊이도 있는 것 같다.

눈물이 말랐다. 눈빛도 흐려졌다.
슬픈 동물처럼 거리를 걸었다.
나는 언제고 갇힌 채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마치 누군가의 처분을 기다리듯이 살아왔다.
나에게는 처분권이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나에게 처분권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이는 소녀의 옆모습이 슬퍼 보인다고 했다.
나는 소녀의 옆모습은 슬프지 않다고 했다.
누군가는 소녀가 먼 곳을 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오래 소녀를 바라보았다.


2016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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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성냥 2017. 3. 12. 16:24

청춘일 때, 나는 청춘을 알지 못했다.
이제 청춘을 아는 것은, 내가 더 이상 청춘이 아니기에.
청춘을 청춘답게 살았더라면 나는 어떠했을까.
자연이 준 아름다움에 그저 나를 맡겼더라면.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쥐어짜듯 애를 써서 가끔 시를 쓴 적이 있을 뿐이다.

나의 청춘은 아직 그곳에 남아있지만,
나는 그곳으로 가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의 청춘은 잘못됐다.

다만, 이제 청춘을 알기에, 청춘을 논할 수 있다.
청춘의 본질은 깊음이다. 청춘은 깊은 바다와도 같다.
청춘은 성숙하다. 청춘을 지난 것보다.
청춘은 지혜롭다.
청춘은 너그럽다.
청춘은 관대하다.
청춘은 자비롭다.

청춘이 있어서 세상이 있는가보다.


2016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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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너에게 조금 중대한 고백을 하려고 해. 어쩌면 J 때문인지도 몰라. J가 온갖 종류의 예의를 혐오했기 때문에 나 또한 마음 놓고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몰라. 그래, 여기서 나는 그들이 그렇게나 중요하게 여기는 예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예의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을 존중해 주는 표현?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사전을 찾아보면 정확한 정의를 알 수 있겠지. 그런데 그러기는 귀찮아. 지금 여기에 사전이 없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여기서 내가 말하는 예의를 예의에 대한 정의라고 치도록 하자. 내가 생각하는 예의는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다양한 종류의 행동양식이다. 처음 만났을 때 서로간에 어색함을 없애고 상대방에 대한 친근감을 표현하기 위한 인사라든지, 맛있는 음식이 있을 때 웃어른에게 먼저 권한다든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존댓말을 한다든지 하는 등의 행위를 사람들은 흔히 예의라고 부르지.

문제는 내가 이런 예의들을 너무도 싫어한다는 데 있어. 나는 왜 예의가 싫을까. 나는 나의 마음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해봤어. 그러는게 나를 조금 더 분명한 사람으로 보이게 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사실 나는 아주 우유부단해. 무언가 결심을 했다가도 주위의 상황이 바뀌면 금새 딴마음을 먹곤 하지.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제안하려고 하고 있다가도 그 사람의 눈치를 보고 아니다 싶으면 - 물론 실제 그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격지심에서 그렇게 된 것이지 - 내가 제안하려고 했던 사실까지 애써 잊으려 할 정도로, 그리고 그게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스스로의 결정 아닌 결정을 합리화할 정도로 나는 우유부단해. 자꾸 그러다보니 나는 무슨 뼈 없는 연체동물인가, 뚜렷한 의식도 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하고, 하는 생각이 드는거야. 나는 너무 흐려서, 조금이라도 더 확실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지나간 일을 자꾸 떠올리고 그 일을 합리화시키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 그 때 나는 그런 행동원리를 염두에 두고 행동했던 거야, 나다운 행동이었지, 하고 생각하며 나를 조금 더 뚜렷한 궤도에 올리고 싶어하는 마음에서였지.

내가 예의를 싫어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배려'에 대해 이야기해야겠어. 배려는 무엇일까. 이것도 사전을 찾아보면 정확한 정의를 알 수 있겠지만 아까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그러지 않기로 할게. 나는 배려를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진실되게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행위라고 생각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식당에서 어떤 사람이 후추를 필요로 하는데 자신의 위치에서는 손만 뻗으면 후추병을 잡을 수 있고 그 사람에게서는 손을 뻗어 잡기에는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후추병을 집어서 건내주는, 그런게 배려지. 나는 일상에서의 작고 진실된 배려들을 좋아해. 그것은 강요되지 않은 행동이야. 순수하게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지.

예의의 시작은 배려야. 어떤 배려가 좋아서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 같은 배려를 서로에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행하고 있는 배려가 있을 때 그것은 사회에서 일종의 행동양식으로 정착될 수 있지.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문제는 그 행동양식에서 최초의 탄생원리인 배려가 사라지는 데에 있어. 이를테면 누군가가 사람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의니까 그렇게 하라고 했을 때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그러하지. 배려가 빠진 예의는 속이 빈 껍데기야. 배려심이라는 알맹이가 없으면 예의는 무의미해. 특히나 강요된 예의는 더더욱 빈껍데기지. 그것은 사람을 괴롭게 만들 뿐이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런 예의가 강요되는 분위기 속에 놓여있어. 그래, 사실 문제는 내가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껍데기 뿐인 예의를 혐오한다는 데에 있는게 아니라 내가 이런 사회의 분위기에 계속 굴복하며 살아왔다는 데에 있는 것 같아. 나는 예의를 싫어하기도 하거니와 무엇이 예의인지 잘 모를 때가 많아. 가령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 인사를 해야되는지, 귀한 음식이 있으면 윗사람부터 맛보게 해야하는지 어떤지 나는 잘 모르겠어.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예의에 대해 잘 알까. 나는 분위기와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해낼 재간이 없어 나의 소신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 오히려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들이 기대하는 예의에 부응하는 것일까, 이리저리 미리 정해져 있을, 상황에 맞는 행동양식을 알아내기 위해 사람들의 눈치를 보곤 하지. 그리고 적당히 예의라고 불릴만한 행동을 하곤 하는데, 그러고 나면 사람들은 일종의 만족한 듯한 시선을 보이며 나도 예의를 알고 중요시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나는 사람들의 그런 반응에서 한편으로 안도감을 느끼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견디기힘든 자괴감에 빠지곤 해.

진실성의 결여. 나는 주위 사람들을 속이고 나 자신을 속인거야. 델리스파이스의 어떤 노래 가사에서처럼 정말 착한 사람이 무슨 소용있겠니. 스스로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것을. 나는 왜 솔직하게 행동하지 못할까.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일까.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에 따르지 않으면 그것에서 낙오될 것이라는. 아니면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들의 싸늘한 시선이라든가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말들을 견뎌낼 자신이 없어서 나는 스스로를 감추고 정체불명의 또다른 나를 만들어 온 걸까. 그건 외로움때문인지도 몰라. 외롭기 싫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스스로를 속였다는 자괴감에서 오는 고통보다 혼자 떨어졌을 때 맛보는 외로움에서 오는 고통이 더 크기 때문에. 아니,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건 고독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

또 하나의 의문. 사람들은 정말로 예의를 좋아하는 걸까. 어쩌면 그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진 않을까. 그들도 모두 강요된 분위기에 못 이겨 예의를 따르고 있으며, 그들이 보기에는 나야 말로 정말 예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까. 모두가 모여서 마음 속에 감춰 둔 진실을 다 털어놓는 자리가 있으면 좋을텐데. 그래서 모두가 진실을 알게 되면 지구에서 껍데기 뿐인 예의가 사라지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외롭고 겁많은 사람들.

...


2007년 10월 10일 저녁, 여섯시 이십분 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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