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파리

낙타 2009. 5. 9. 23:49

이천육년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행정병으로 군복무 중이었던 나는 낡은 사단 건물의 사무실에서 문서작성을 하고 있었다. 아침 마다 화학대의 방역차가 부대 안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소독약을 뿌려댔지만, 파리들은 그 때 높은 곳에서 그 장면을 내려다 보며 비웃었나보다. 건물 안팎을 가릴 것 없이 파리가 정말 많았다. 나는 컴퓨터 옆에 파리채를 두고 수시로 파리를 잡아가며 업무를 하였다. 어느 순간 모니터에 파리가 앉았다. 파리를 수도 없이 잡아본 나는 익숙한 솜씨로 파리를 내리쳤다. 파리 몸통이 박살나 지저분하게 피튀기며 흩어질 정도로 강하지도 않으며 파리가 안 죽고 살아날 정도로 약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정도의 강도, 경험칙상으로 보건대 분명 파리가 형체를 유지한 채 깔끔하게 죽어야할 정도의 강도로 정확하게 가격했다. 그런데 그 파리가 죽지 않고 날아갔다. 나는 순간 강한 의아함을 느꼈다. 죽어야할 파리가 죽지 않고 살아서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파리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는데, 그 길이가 그리 길지는 않았다. 파리는 일미터 쯤을 날고 나서는 밑으로 뚝 떨어졌다. 그 때야 비로소 죽은 것이다. 나는 그 파리를 보며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 파리도 의지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타격을 맞은 파리가 날고 싶다는, 아니 살고 싶다는 강한 본능 때문에 그 순간 남아있던 온 힘을 쏟아 그 일미터를 날아낸 것은 아닌가.

영화에서 똥파리(상훈)는 아버지를 개 패듯이 팬다. '아버지의 귀두'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무언가가 뜨뜻미지근하게 뒤엉킨 느낌의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영재에게 망치로 머리를 수십차례 두드려맞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스러져 죽어가는 상훈의 모습을 보면서 든 느낌이나, 중학교 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류승완 감독의 영화)'에서 싸움 도중 사람의 눈알이 터지는 장면을 보고 어린 마음에 토악질이 나오려 했을 때 보다도 훨씬 선명한 느낌의 충격이 밀려왔다. '충격'이라기 보다는 '기묘'했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 같다. 예전 누군가의 영화나 소설 속에서, 혹은 현실에서 이미 있었던 일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광경을 이 영화를 통해서 처음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하나의 금기가 깨어졌음을 비로소 확인한 것이다.

상훈이 연희와 조카 형인이를 데리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즐거워하는 장면은 특이한 기법으로 촬영되었다. 동물의 시선 - 똥파리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특이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만, 영화 제작에 관하여서 문외한인 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였다. 상훈이 즐거워하는 모습은 굉장히 낯설었다. 어지러웠다. 그는 즐겁게 살아서는 안되는 운명을 지고 있다고 보였다. 그가 행복해하는 모습은 한편으로 커다란 불안감을 자아냈다. 그 행복이 곧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주 낯선 것, 혹은 이루고 싶은 것이다.

영재는 누나인 연희가 돈을 주지 않자 연희의 교복을 찢어버리겠다며 연희를 위협한다. 위협이다. 연희는 영재가 손에 쥔 교복을 빼앗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연희는 거의 매일 지각을 하고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도 꿋꿋이 학교를 다닌다. 연희는 학교를 다니고 싶어하는 것이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아버지와 양아치 동생에게 치이며 집안 살림을 이끌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삶이 벅찬 연희에게, 학교를 다니는 것은, 교복을 입는 것은 커다란, 어쩌면 삶에서 유일한 기쁨이다. 상훈이 뱉은 침이 그의 교복에 묻었을 때, 그 무섭게 생긴 건달에게 당돌하게 대들 수 있었던 힘도 여기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똥파리는 죽으면서 사랑을 남겼다. 연희의 눈물, 어린 형인의 눈물, 친구 만식의 눈물, 누나의 눈물, 아버지의 눈물. 상훈을 사랑하던 이들의 눈물이었다. 용역 깡패 사장이었던 만식이 고깃집을 개업한 날 이들이 모두 모인다. 남들과 같은, 보통의 가정을 갖지 못한 이들의 모임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들은 함께하는 기쁨을 갖는다. 모두 상훈이 사랑하는 이들이다. 상훈이 '개 패듯이' 팼던 그의 아버지도 상훈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왜 살까. 정말 추상적이고 상투적이고 막막한 질문임을 안다. 그리고 사람들 마음 속에 저마다의 그림이 있을 줄을 안다. 비록 밖으로 표현하지는 못할지라도, 선명하지 않아서 스스로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지라도 모두들 삶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삶의 가장 큰 의미는 모두가 아기일 적에 이미 알았을 수도 있다. 성장하고 늙어감은 이미 아기일 때 자신이 알았던 것을 다시 알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다.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두 번째의 깨달음은 깨달음이 끝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오히려 깨달음은 시작이다. 똥파리는 왜 살았을까. 왜 살고 싶어 했을까. 나는 지금까지 왜 살아왔을까. 나는 왜 살고 싶어할까. 영화는 이 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유도하고 넌지시 나름대로의 해답을 암시한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내가 잡았던 그 파리를 잊지 못할 것 같다.
Posted by ma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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