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낙타 2017. 8. 23. 01:34

 

 

책을 읽기 전에는 특별히 일관성 없는-있더라도 약한 정도로 있는-단편집인줄 알았다. 그런데 끝까지 읽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이 있었다. 그것은 '불륜'이었다. 물론 그 일관된 흐름이라는 것을 '불륜'이라는 단어 하나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실 '불륜'이라는 객관적인 행위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어떤 감정에 관한 것이다.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이 깊은 공감을 할 수 있는.

 

(그런데 사실 7개의 단편들-드라이브 마이 카, 예스터데이, 독립기관, 셰에라자드, 기노, 사랑하는 잠자, 여자 없는 남자들-중 하나가 흐름에서 벗어나 있기는 하다. '사랑하는 잠자'가 그렇다. 아마 원래의 일본어판 책에는 '사랑하는 잠자'는 빠져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책띠에 "한국어판 특별 수록 '사랑하는 잠자'"라는 기재가 당당하게 인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잠자'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아마 하루키는 일종의 실험정신으로 이 단편을 써본 것 같다. 아무튼 '사랑하는 잠자'는 책 전체의 일관성을 해치고 있다. 고급스러운 재즈바에서 쌩뚱맞게 갑자기 네오펑크가 나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덧붙이자면, 나는 네오펑크 음악을 좋아하고 고급스럽지 않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이것이 빠지고 6개의 단편만 실린 소설집이었다면 책 전체의 완성도도 더 높았을 것이며 훨씬 아름다운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집에 '사랑하는 잠자'가 들어간 것은 출판관계자의 실수 또는 졸속적인 업무처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덧붙이자면, '사랑하는 잠자'는 그 자체로는 꽤 훌륭한 단편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 책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사랑하는 잠자'를 뺀 나머지 6개에 관한 것이다.)

 

6개의 단편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아직 읽은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가장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것은-'기노'이다. '기노'는 '기노'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말해보면 다음과 같다.

 

<기노는 업무차 출장을 갔다가 우연히 예정보다 하루 일찍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 아내와 한 남자-기노가 회사에서 제일 친하게 지내던 동료였다-가 벌거벗은 채 침대에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내가 쪼그려 앉은 자세로 위에 올라타 있었기 때문에 기노는 문을 열었을 때 아내와 정면으로 얼굴을 맞닥뜨렸다. 기노는 여행가방을 도로 멘 채 집을 나왔고, 다음날 회사도 그만두었다.

 

이후 기노는 이모의 집을 빌려 거기서 작은 술집을 운영했다. 가게 이름은 자신의 이름과 같은 '기노'로 정했다. 그러면서 아내와의 이혼 절차를 진행했다. 그러는 동안 기노의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무덤덤했다. 아내와 그 남자에 대한 분노나 원망도 일지 않았다. 그냥 원래부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여기고 받아들였다. '기노'라는 술집에서 기노는 편안함을 느끼면서 지냈다. 아름다운 회색 길고양이가 '기노'를 찾은 이후 그곳에 손님이 들기 시작했고, 매달 임대료를 낼 정도 이상의 매상을 올리며 만족할만한 생활을 했다. 가게에서 손님과 시비가 붙은 적도 있고 손님으로 온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적도 있지만, 기노의 생활을 흔들어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는 와중에 아내와의 이혼이 정식으로 성립되어 기노는 아내를 만났다. 기노는 무덤덤하게 아내를 만났고 지난 일을 캐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되자 '기노'에서 고양이가 사라졌고, 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기노는 한 단골손님의 말을 듣고 여행을 떠난다(그 손님은 기노에게 기노가 무언가 옳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는 등의 말을 하고 자신이 기노의 이모와 아는 사이라는 말도 했다. 그리고 기노에게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가미타'라는 이름을 가진 그 손님의 말에는 논리를 뛰어넘은 신비한 설득력이 있었다. 합리적인 이유는 없었다. 기노는 '그냥' 그 가미타의 말을 믿기로 했다).

 

구마모토 역 근처의 싸구려 비즈니스호텔에서 묵고 있을 때 기노는 기묘한 경험을 한다. 깊은 새벽(이라고 해야할지 깊은 밤이라고 해야할지 애매한 오전 두시 십오분) 누군가가 기노의 방문을 노크한다. 간결하고 단단하며 규칙적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기노는 깨달았다. 그 노크가 방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대한 것임을. 기노는 따스함을 느끼며 생각한다. 자신이 상처받았음을. 그것도 몹시 깊게 그러했음을.>

 

나머지 5개의 단편들도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불륜-최소한 불륜적인 어떤 것-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나 역시 '불륜적인 어떤 것'에 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이 정도로 완화된 표현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 이상의 것을 위한 용기와 결단은 아직 나에게는 없다(이건 또 뭔 X소리야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말일 것이다)). 하긴 어쩌면 이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불륜적인 어떤 것에 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에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고, 이렇게 이 책에 대한 나의 감상을 적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떤 일을 당했는데-혹은 겪었는데-나는 내가 그것으로 인하여 고민하고 있거나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후려쳐서 말하면, '내가 왜 그깟일에 연연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나는 사실은 그 일을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신경이라는 것은 대체로 의식의 표면 아래에 있는 것 같다. 표면 위로 드러나는 부분은 그리 크지 않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표면 아래의 부분이 더욱 커지는 것이기도 하다.

 

말은 쉽다. 그렇지만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을 '별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실제로는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어렵다. 평생 동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때때로 실제로는 '별것'인 것을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은 자기보호본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정말 '별것'이라면 나는 너무 힘들 것이다. 그러니 일단 그것을 별것 아닌 거라고 치부하자. 하는 식으로.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러한 사고방식은 더 큰 상처나 화를 불러온다. 그것은 덮어놓는다고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덮어놓으면 오히려 더 커지는 것이다. 언젠가는,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의 의식의 표면 위로는 끌어올려 정면으로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서야 그것은 사그러들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불륜 또는 '불륜적인 어떤 것'에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나는 최근에 나름대로 내 안에 묻혀 있던-또는 묻어 두었던-몇가지를 의식의 표면 위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시도했었다. 그리고 흡족해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었던 것 같다(몇가지 이유가 있어서 내가 시도했던 방법을 여기에 적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그 방법이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개인적인 루트를 통해 문의를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그래도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내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은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불륜은 인류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내가 끌어안고 있는 문제들 중 상당수도 그러할 것이다.

 

▶ 그래서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라고 묻는다면 나는 곤란하다. 나는 그냥 이 책에 관해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책을 읽고나서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어설픈 글이나마 남겨본 것이다.

Posted by ma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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