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에게

얼음 2017. 5. 16. 01:07

살다보면 누구나 약해지는 때가 있지. 별일 없이 잘 사는 사람이든, 우여곡절을 겪으며 힘겹게 사는 사람이든, 불현듯,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너무도 벅찬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어. 나도 그래. 다들 그래. 너 또한 그러하겠지.


넌 늘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로 살아가는 듯이 보였어. 그런데 넌 힘들어 하면서도 언제나 오롯했어. 너의 그 사명감을 마주하면서, 감히 난 너의 어깨로 손을 뻗지 못했어. 나는 그저 널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언젠가 넌 이제 세상이 재미없다고 말했어.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세상 여기저기에는 재밋거리들이 숨어있다고 말했지만, 그건 내 진심이 아니었어. 사실 나의 마음은 너의 마음과 같았어. 왜냐하면 그건 너의 진심이었기 때문이야. 너에게 세상이 재미없는 이유는 너가 세상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어. 너는 세상을, 아니 너의 삶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삶이 재미없었던 거야.

 

너는 술을 좋아했어. 너는 도를 넘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고, 때때로 나는 그런 너를 나무랐어. 나는 너를 나무란 것을 후회하고 있어. 너가 술을 좋아한 이유는 너에게 세상이 너무 선명했기 때문이었어. 너에게 세상의 색채는 너무 강렬했어. 그건 너가 너무 맑았기 때문이야. 너는 지독히도 강렬했던 색채를 맑은 정신으로 직면하기가 힘들었던 거야. 잠시나마 그 강렬함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너는 술을 마셨던 거야.

 

언젠가 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를 떠났어. 떠난 것이 아니라 그저 기별하지 않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 한동안 나는 너를 찾아 헤맸어. 그러다가 나는 사실은 내가 너를 찾고 있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이제 나는 너를 찾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아. 그저 가끔, 오늘처럼 삶이 무거운 날 너가 떠오르기는 하지만.

Posted by ma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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