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7.06.25 2017 6 24 1
  2. 2017.06.06 그리워 1
  3. 2017.05.17 희망 2
  4. 2017.05.16 H에게
  5. 2017.03.12
  6. 2010.01.17 로보트태권브이
  7. 2010.01.08 그게 습관이 되어
  8. 2010.01.08 옛날 사람
  9. 2008.12.14 지금, 여기
  10. 2008.06.05 남자의 마음

2017 6 24

얼음 2017. 6. 25. 00:42

비가 내렸으면 좋겠어.

흠뻑 젖고 싶어.

한없이 우울하고 싶어.

끝을 알 수 없는 바닥에 닿고 싶어.


눈물을 흘리고 싶어.

비를 내리고 싶어.

모든 것을 녹이고 싶어.

내가 너인지, 너가 나인지, 알 수 없었으면 좋겠어.


망가지고 싶어.

흐트러지고 싶어.

더러워지고 싶어.

어느 후미진 골목에 숨어서 담배를 피우고 싶어.


무너져 내리고 싶어.

하염없이 슬퍼하며 바닥보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싶어.

지하에 숨어 지내면서 위에서 나는 빗소리를 듣고 싶어.

누가 나를 찾을까봐 두려워하고 싶어.


비겁하고 싶어.

거짓말을 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으면 좋겠어.

나는 단지 숨기 위해서 거짓말을 할 뿐인걸.

나는 단지 도망가기 위해서 비겁한 것일 뿐인걸.


나는 아직 사라질 용기는 없어.

얼마 전 내가 아직 사라짐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절절히 알았어.

나는 그저 숨을 수밖에 없어.

흠뻑 젖은 채로 계속 숨어 있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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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

얼음 2017. 6. 6. 19:09

그리워.

내가 태어나기 전의 시간들이 그리워.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그리워.


아빠의 소년 시절이 그리워.

80년대의 신촌이 그리워.

90년대의 일산이 그리워.


내가 너를 알지 못하던, 너의 어린 시절이 그리워.

너의 기억들이 그리워.

너의 그리움이 나는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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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얼음 2017. 5. 17. 00:16

나는 무엇에 괴로워해야 하나.

나는 무엇에 기뻐해야 하나.

나는 무엇에 눈물 흘려야 하고, 무엇에 미소 지어야 하나.

 

잡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보이는 것이 없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무엇을 살아온 것일까.

 

한 걸음 내딛으려 해도 발 디딜 데가 없다.

손을 내 밀어 보아도 잡히는 것이 없다.

눈앞에는 그저 텅 빈 허공이 있을 뿐이다.

아니, 이것은 허공도 그 무엇도 아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시작인지 끝인지 중간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차가운지 뜨거운지 적당한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슬픔인지 기쁨인지 평온함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흐름인지 정지인지 이도저도 아닌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차라리 잘 되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함으로써, 한 가지만은 또렷하게 알겠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행하겠다.

나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함으로써,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느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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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에게

얼음 2017. 5. 16. 01:07

살다보면 누구나 약해지는 때가 있지. 별일 없이 잘 사는 사람이든, 우여곡절을 겪으며 힘겹게 사는 사람이든, 불현듯,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너무도 벅찬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어. 나도 그래. 다들 그래. 너 또한 그러하겠지.


넌 늘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로 살아가는 듯이 보였어. 그런데 넌 힘들어 하면서도 언제나 오롯했어. 너의 그 사명감을 마주하면서, 감히 난 너의 어깨로 손을 뻗지 못했어. 나는 그저 널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언젠가 넌 이제 세상이 재미없다고 말했어.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세상 여기저기에는 재밋거리들이 숨어있다고 말했지만, 그건 내 진심이 아니었어. 사실 나의 마음은 너의 마음과 같았어. 왜냐하면 그건 너의 진심이었기 때문이야. 너에게 세상이 재미없는 이유는 너가 세상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어. 너는 세상을, 아니 너의 삶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삶이 재미없었던 거야.

 

너는 술을 좋아했어. 너는 도를 넘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고, 때때로 나는 그런 너를 나무랐어. 나는 너를 나무란 것을 후회하고 있어. 너가 술을 좋아한 이유는 너에게 세상이 너무 선명했기 때문이었어. 너에게 세상의 색채는 너무 강렬했어. 그건 너가 너무 맑았기 때문이야. 너는 지독히도 강렬했던 색채를 맑은 정신으로 직면하기가 힘들었던 거야. 잠시나마 그 강렬함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너는 술을 마셨던 거야.

 

언젠가 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를 떠났어. 떠난 것이 아니라 그저 기별하지 않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 한동안 나는 너를 찾아 헤맸어. 그러다가 나는 사실은 내가 너를 찾고 있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이제 나는 너를 찾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아. 그저 가끔, 오늘처럼 삶이 무거운 날 너가 떠오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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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2017. 3. 12. 16:26

너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어
작고 보드라운 하얀 고양이
귀여운 아기 고양이

나에게 넌 고양이였어
너는 커다란 도시에서 단 하나뿐인
작고 아늑한 공간에 숨어 있었어

도시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나는
아주 이상한 이끌림에 의해서
너의 공간을 발견했어
너와 고양이가 있던 그 작고 예쁜 곳

너는 고양이를 귀여워했어
나는 너를 귀여워했어
나는 행복하면서 불안했어

작고 평화로운 너의 공간을 없앤 건 나였어
나는 지금도 그곳이 그대로일 것 같아
따스한 그곳에 고양이와 너가 있을 것만 같아


2016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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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트태권브이

얼음 2010. 1. 17. 21:11
겨울.
회색 건물 위로 연기가 뿜어 나온다.
연기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옅은 그림자로 덮으며 바람을 따라 흘러간다.
날카로운 공기 속에서 홀로 유유하다.
나는 하얀 입김을 불며 서 있다가 문득 연기를 멈추어 본다.
그리고 슬며시 그 속에 몇 해 전의 내 얼굴을 담아 본다.
살찐 볼과 주근깨. 둥그렇고 하얀 것들을 담아 본다.
Y와 S를 담는다.
또 꿈틀대는 것들을 담아 본다.
높은 곳에서 흐르는 것들을 담아 본다.
담을 수 없는 것들을 담아 본다.

나는 다시 연기를 흘려 보낸다.
하늘 위로 흘러간다.
높이높이 올라가 연기는 구름이 되어라.

구름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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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습관이 되어

얼음 2010. 1. 8. 23:55

잠시 머물러 있으려고 했던 것 뿐인데
그게 습관이 되어 나는 이제 떠나지를 못합니다.

때가 되기를 기다리며 잠시 서 있었던 것 뿐인데
그게 습관이 되어 나는 그 때가 되었는데도 걸음을 떼지 못합니다.

잠시 세상을 외면하고 싶어 멍해졌던 것 뿐인데
그게 습관이 되어 나는 지금도 멍하니 하늘만 바라봅니다.

잠깐 동안 도망쳐 나와 있으려고 했던 것 뿐인데
그게 습관이 되어 나는 이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한 동안만 다른 이가 되어 살아보려고 했던 것 뿐인데
그게 습관이 되어 나는 이제 원래의 내 모습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2010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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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

얼음 2010. 1. 8. 23:52
나.
다시 옛날로.
아니, 내가 옛날에.
나는 옛날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당신처럼 고민하고 아파했었습니다.
나의 심장은 뜨거운 피를 내뿜으며 뛰고 있었습니다.
나 또한 당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랑.
당신에게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식어서 굳어진 화석같은 존재이지만,
나도 한 때는 뜨겁게 흐르는 눈물이었습니다.


2009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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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얼음 2008. 12. 14. 00:32

아무 것도 없을 줄 알았던 여기
시원한 바람 한 자락 있었네

타버린 후 재만 싸늘히 남은 줄 알았던 여기
초록빛 들풀 한 포기 있었네

마지막 꽃잎까지 시들어, 메말라버린 줄 알았던 여기
땅 밑에는 쉼 없이 물줄기 흐르고 있었네

시간조차 멈춰버린 줄 알았던 여기
해는 늘 뜨고 지고 했었네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여기
머리 위에는 항상 넓은 하늘 있었네

아무도 찾지 않을 줄 알았던 여기
멀리서 그 사람 발자국 소리 들려오네


2008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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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마음

얼음 2008. 6. 5. 20:47

밤 공기에 젖은 마음이

아침이면 다시 마를 줄 알았는데

벌써 해가 중천을 넘었음에도

축축함이 그대로다

낮을 낮의 마음으로 보낼 수 있기를

또한 그렇기에 밤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이천팔년 유월 사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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