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17.06.24 친일파 문제
  2. 2017.06.03 이어쓰기
  3. 2017.03.12 생각 정리
  4. 2017.03.12 후려쳐서 생각해 본 사드 문제
  5. 2017.03.12 글을 쓸 수 없다
  6. 2012.05.01 근황
  7. 2010.01.17 장병문예 낙선작
  8. 2009.11.28 흔들리지 않기 1
  9. 2008.12.05 그 사람
  10. 2008.05.03 미안하다고 했던 것 취소

친일파 문제

우주 2017. 6. 24. 21:01

친일파는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나의 생각을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친일파 타령이라니, 한때는 분명히 큰 문제였지만 이제는 충분히 희석된 과거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 정말 얼핏생각한다면 말이다. 또는 친일파 문제에 사적인 이해관계가 걸려있어서 친일파 문제가 언급되는 것을 껄끄러워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암튼 이런저런 이유로 친일파 문제가 거론되는 것을 싫어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도 한국 사회에서 친일파 문제는 매우 중요한 현안이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더 승승장구했다. 그들의 자손들까지도 부유하게 살았다. 반면 독립운동가들과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사람들은 해방 이후에 그에 상응하는 예우 내지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들의 자손들은 궁핍하게 산 경우가 많았다. 한국의 시민들은 이러한 세태를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의(正義)나 선()에 관한 회의(懷疑)감을 체화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의로움과 선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도 좋을 게 없다. 경제적인 보상은 당연히 없고, 그로써 명예를 얻기도 매우 어렵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는 정의와 선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조차 너무 헷갈린다는 것이다. , 한국인들은 자신들도 잘 모르는 사이에 정의와 선에 관하여 부정적인 가치관을 내면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현대사에서 그 가장 큰 원인은 친일파 청산을 하지 않은 것에 있다.

 

한국의 시민들은 정의와 선 앞에서 좌절하고 시나브로 정의와 선을 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은 오랜 기간 동안 정치적인 독재와 경제구조의 왜곡을 마주하면서도, 놀랍도록 큰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대체로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왔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시민들이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어떤 행동, 특히 집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민 개개인들을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도록 유도해 왔다.

 

한편으로는 어쩌면 한국 사람들의 내면에는 아직까지도 왕조시대의 관념이 이어져오고 있을 수도 있다. , 사회에 어떤 절대적인 권력이 있어야 하고, 국민들은 그에 복종하여야 한다는 관념이 아직까지도 한국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수도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무렵까지는 실제로 조선시대를 산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는 왕조시대적인 관념이 현재보다 훨씬 강했을 것이다.

 

복합적인 원인들 때문이겠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정의와 선에 관한 가치가 절하되고 왜곡되어 있다. 부패가 만연해 있다. 무엇이 정의이고 선인지, 무엇이 부패인지조차 제대로 알기 어려운 사회이다. 나는 복합적인 원인들의 중심에는 친일파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고 확신한다. 많은 사람들은 정의와 선이 실현되지 않음을 목도하고 좌절하였다. 추구해야 마땅한 가치에 대하여 체념하고, 권력을 가진 자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도록 길들여졌다. 신분제도 속에서 체념하고 살던 왕조시대의 습성이 이어졌다.

 

그런데 다행히도 또는 놀랍게도 한국의 시민들은 최후의 보루는 지키고 있었다. 1960년의 4.19 혁명이 그러했다. 친일세력과 손잡은 독재정권에 대하여 시민들은 분노했고, 행동했다. 1970년의 전태일이 그러했다.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인간을 소외시키며 숫자에만 집착하던 권력자들에 대하여 한 청년은 분노하며 자신의 몸을 불살라 저항했다. 한 청년만의 분노가 아니었다. 이는 모든 노동자들, 나아가 시민들의 고통과 절망, 분노를 담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80년의 5.18 광주민중항쟁이 그러했다. 광주시민들은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과 살상을 목도하며 분노했고,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사명감을 가지고 계엄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1987년의 6월 항쟁이 그러했다. 쿠데타와 광주학살을 통해 탄생한 군부독재정권을 시민들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시민들은 민주화를 염원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016년의 촛불집회가 그러했다. 시민들은 권위주의 시대로 회귀하려는 정권과 국정농단에 대하여 크게 분노했다.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은 마침내 대통령을 탄핵되도록 만들었다. 촛불집회에 직접 참여하고 이를 경험해 보면서, 나는 오랜 세월 억압되어 왔던 우리 시민들의 정의와 선에 대한 갈망이 뜨겁게 분출하고 있음을 느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첫 단추가 아직도 잘못 끼워진 채로 있다. 친일파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한 정의와 선에 대한 왜곡된 관념이 바로잡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질만능주의와 위악이 만연한 작금의 사회에서 정의와 선은 더욱 중요시되어야 할 가치이다. 나는 정의와 선이 궁극적으로는 물질적인 풍요와 인간답게 살 권리에도 큰 보탬이 될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지금 이 시기가 한국 사회의 큰 기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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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쓰기

우주 2017. 6. 3. 00:29

올해가 몇 년인지,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애써 생각하지 않으면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누군가는 내가 이런 말을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생물학적인, 또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나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내가 무슨 다른 말을 할 목적이나, 구체적이거나 체계화된 생각을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문득 들었던 생각을 한 번 이야기해 보는 것일 뿐이고, 이것은 뒤에 이어질 이야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순간 강하게 떠오른 생각을 언급하지 않으면, 그 이후의 또는 그 이외의 이야기는 가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이 얘기는 조금 더 그럴듯하게 말해보면, 나에게 있어서 시간에 대한 관념이나 인식 또는 느낌(느낌이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이 이상해 질 때가 많다, 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공간에 대한 느낌이 이상해 질 때도 많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이 진짜인지 아닌지에 관한 의문이 생길 때도 있다. 갑자기 시공간의 현실감이 없어지는 느낌. 누구나 살다보면 그런 느낌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트릭스나 인셉션 같은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사람은 더욱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술을 마셨을 때의 느낌이 그런 느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덧붙이자면, 이것은 아주 맑고 집중된 마음상태에서 경험할 수 있는 느낌일 수도 있다.

 

가끔은, 이건 도대체 말이 되지 않아,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아니, 그런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 때가 있다. 사람은 자기가 한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상당히 많을 수도 있다. 특히, 어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의 경우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또는 자신은 선택이 불가능했던 상황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출발점을 외면하고, 그 이후의 일들에 관하여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살아가라고 하면, 나는 어쩐지 이상하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그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은 결과적으로 나쁜 사람들을 옹호하는 생각이 될 수도 있다, 라는 등의 반박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지금은 그런 사회적인 맥락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냥 개인적인 감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에게는, 지나치게 개인들에게 책임을 묻는 사회가, 세상이, 어쩐지 너무 가혹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겉으로 보기에도 힘들어 보이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겉보기에는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 많이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힘들게 사는 것이 자기 자신의 책임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다른 누군가가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힘든 건 너의 책임이니까 불만을 갖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어쩐지 그건 너무 비정한 것 같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힘든 시기를 불안과 걱정을 밑천으로 하여 살았다고, 버텨냈다고 한다. 나는 그 말로부터 위안을 얻었다. 아름다운 말이었다. 불안과 걱정을 밑천으로 삼다니. 나도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그 말이 나의 깊은 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작은 떨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내 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불안과 걱정까지 밑천으로 하여 살아야 하는 삶이라니. 버텨야 하는 삶이라니. 삶은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이건 도대체 말이 되지 않아. 삶은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런 표현을 내놓기 전에 많은 시간을 망설였다. 내가 이런 표현을 해도 좋을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표현이 나의 것인지, 나의 것이 될 수 있을지를 잘 모르겠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것만을 사용하여 글을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글은 내가 썼더라도 나의 글이 아니다. 어떤 표현이 나의 것인지 아닌지는 나만 알 수 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은 솔직하고 용감해야 한다. 그런데 특히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은 가장된 솔직함, 가장된 용감함이다. 근원이 가짜라면 아무리 진짜처럼 보이려 애를 써도 결국에는 가짜일 뿐이다. 나는 진짜만을 말하고 쓰고 표현하고 싶다.

 

예전에 나는, 내가 외롭기가 싫어서 자꾸 글을 쓰나 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도 비슷하다. 나는 그냥은 견디기가 힘들 때 글을 쓰거나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진짜를 표현하고 싶다. 진짜가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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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정리

우주 2017. 3. 12. 16:40

요 며칠 했던 산만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시공(時空)


시간이 멈추면 어떻게 될까.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간이 멈춘 장면을 보게 된다. 주인공의 시간만이 멈추지 않고, 주인공은 신기해하며 정지 상태로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 사이에서 혼자만 움직인다. 만약 정말로 시간이 멈춘다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장면과 비슷한 상황이 나타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일단 시간이 멈추면 빛도 멈추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된다. 한편으로는, 본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무언가를 ‘인식’하는 것이고, ‘인식’은 시간을 전제로 하여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멈추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감은 물론 의식도 전혀 작동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멈춘 상황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시간이 멈췄다가 다시 흐른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이를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멈추는 일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생명체(더 정확하게는 인식능력이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무의미하다.


원자는 중성자, 양성자 등으로 이루어진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가 대형 월드컵 경기장 정도의 크기라면, 원자핵은 축구공 정도의 크기이다. 즉, 원자는 거의 텅 비었다. 중성자와 양성자는 쿼크라는 입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쿼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우리가 인식하는 물질은 사실은 거의 텅 빈 상태이고, (쿼크 및 그 보다 작은 단위의 입자들의 실체를 끝까지 파헤쳐 보면) 어쩌면 완전히 텅 빈 상태일지도 모른다. 전자 등이 매우 빠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하는 물질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시간이 멈춘다면 전자 등의 움직임도 멈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의 또는 모든 물질이 사라진 텅 빈 상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 멈추면 텅 빈 공간과 어둠만이 남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없으면 공간 또한 있을 수 없다. 즉, 시간이 멈추면 공간도 사라질 것이다.


시간이 멈추면 그야말로 ‘모든 것이 사라진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라고 표현은 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인식하거나 상상할 수 없다. ‘루트 -2’ 같은 허수를 표시할 수는 있지만, 사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우리는(혹은 나는) 정말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떠올릴 수 없다. 그것은 아무런 빛도 없는 텅 빈 공간과도 전혀 다르다. 점 하나만 있는 그런 상태도 아니다(그런데 우리는 점 하나만 있는 상태도 떠올릴 수 없다. 아무런 공간도 없이 오로지 점만 딱 하나 있는 장면은 아무리 애를 써도 머릿속에 그릴 수 없다).


즉, 시간이 멈추면 공간도 모두 사라지는데, 우리는 그러한 상태를 떠올릴 수 없다. 타면으로는, 공간 없이 시간만 존재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시간과 공간은 불가분이다. 시간과 공간을 합한 ‘시공’이라는 단어는 매우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2. 의식


그런데 시공은 실재하는 것일까. 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시공이 실재하는지, 아니면 의식 속에만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관념론(이론적이건 실천적이건, 관념 또는 관념적인 것을 실재적 또는 물질적인 것보다 우선으로 보는 입장)은 대체로 시공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입장으로 이어지고, 유물론(물질을 제1차적·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설)은 대체로 시공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입장으로 이어진다(이상은 네이버 철학사전을 참조하였습니다).


시공이 실재하는지 여부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시공을 인식하는 의식이 있음은 거의 분명하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 안다.


시공 및 시공을 기반으로 한 에너지와 물질들이 실재하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존재’하고 그 존재를 인식하는 ‘의식’이 있음은 거의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시간과 공간이 불가분인 것처럼, 존재와 의식도 불가분이라고 생각한다.


얼핏, 존재만 있고 의식은 없는 상태도 가능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빅뱅 이후 우주에 생명체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무언가 존재는 하지만 이를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생명체 출현 이후에도, 개별적인 의식들의 협소함에 비추어 의식이 미치지 않는 존재도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일단, 관념적으로 보면 의식을 벗어난 존재는 무의미하다. 그렇지만 관념적으로 무의미하더라도 존재는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에 대하여 나는,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존재들은 인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의식을 벗어난 존재는 없다고 본다. 빅뱅의 순간은 아직까지도 온 우주에 남아 있고,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가능성도 있다. 몇백년 전의 사람이 한 몸짓 하나도, 우리가 현재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의식 없는 존재는 있을 수 없고, 존재 없는 의식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즉, 존재와 의식은 불가분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의식은 존재에 포함되는 개념일 수도 있겠다.


3. 이유


존재와 의식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태초에 갑자기 존재와 의식이 생겨난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태초’라는 표현은 직선적 시간관을 전제로 한 표현인 것 같다. 직선적 시간관과 대비되는 원형적 시간관에 기초하여 보면, 태초라는 것은 없거나 무의미할 것이다.


2015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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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문제는 크게 경우의 수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중국의 반발에 근거가 있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중국의 반발에 근거가 없는 경우이다. 애매한 제3의 경우가 있을 수도 있지만 사실상 상정하기 어렵다. 첫 번째 경우, 즉 중국의 반발에 근거가 있는 경우를 A라고 칭하겠다. 두 번째 경우, 즉 중국의 반발에 근거가 없는 경우를 B라고 칭하겠다.


A의 경우는 실제로 사드가 중국에게 위협이 되거나 불이익을 주는 경우이다. 만일 사실관계가 A로 판명된다면 문제의 구조가 매우 명확해 질 것이다. 한국에의 사드 배치는 미국이 원하는 것이고 미국에게 이익을 줄 것이며, 중국은 원하지 않고 중국에게 불이익이 된다. 즉, 한국이 미국과 중국 중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의 문제가 남게 된다.


B의 경우는 실제로 사드가 중국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불이익을 주지도 않는 경우이다. 그런데 사실관계가 B에 해당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B의 경우라면 중국은 지금 큰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다. 중국은 사드가 중국에게 위협이 되고 불이익을 준다고 판단하고, 한국에 경제적 제재를 가하는 등 한국에 대한 보복을 진행하고 있다. 만일 중국이 착각에 빠져서 이런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중국은 매우 무능한 것이다. 중국의 정보력과 판단력이 매우 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중국은 현재 어마어마한 강대국이고 정보력과 정책적 판단력 또한 엄청나리라고 본다. 그렇지만 혹시 모르니 B의 경우에 관하여도 논해 보겠다.
B는 다시 경우의 수를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A의 경우와 결론적으로 같아지는 경우, 즉 한국이 미국과 중국 중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의 문제로 귀착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를 B-1이라고 칭하겠다. 그러한 문제로 귀착되지 않는 경우를 B-2라고 칭하겠다.
B-1은 중국을 착각으로부터 일깨우지 못하거나 중국의 고집을 꺾지 못하는 경우이다. 중국은 자신이 착각에 빠졌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더라도 태도를 바꾸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B-1의 경우라면 사실관계가 어떻게 되든 중국은 한국에의 사드 배치를 계속 반대하고 한국에 대한 보복을 계속 진행할 것이고, A의 경우와 같은 문제가 남게 된다.
B-2는 중국을 착각으로부터 일깨우고 중국의 고집까지 꺾는 경우이다. 이렇게 하려면 한국은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한다. 일단 사드가 왜 중국에 위협이 되지 않고 불이익을 주지 않는지를 매우 상세하게 연구하고 분석해야 할뿐더러 이를 중국에게 아주 잘 설명해야 한다. 또한 온갖 정치외교적 전략을 총동원하여 중국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거나 중국의 고집을 꺾어야 한다. 만일 성공한다면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결과에 이를 수 있다. 즉, 한국이 중국과 미국 둘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 정부의 태도를 보면 한국은 B-2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그렇게 보기에는 지금 한국 정부는 너무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사드가 왜 중국에 위협이 되지 않고 불이익을 주지 않는지에 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 놓지 못하고 있고, 중국에 대하여 별다른 정치외교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 같아보이지도 않는다. 즉, 현재 한국 정부는 매우 무능해 보인다. 심지어 한국 정부와 언론은 중국의 도덕성을 탓하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다. 국가 간의 관계는 주로 정치적인 힘의 논리와 경제적인 이익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국제사회에서 도덕성의 잣대를 가지고 어떠한 문제가 논해지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북한의 인권 문제, 무슬림의 할례 문제 등 누구든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는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이러한 경우 대개 강자들이 우월적인 시선으로 약자를 바라보는 형태이다). 사드 문제는 군사적인 문제이고 정치적으로 매우 첨예하고 민감하게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문제이다(강자들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도덕성의 잣대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즉, 현재 한국 정부와 언론의 태도는 매우 이상해 보이기까지 한다.


B-2를 제외하면 한국이 미국과 중국 중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의 문제가 남게 된다. 그런데 나는 B-2는 매우 가능성이 낮은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결국 문제는 한국이 미국과 중국 중 누구를 택할 것인지로 귀착된다고 본다. 한국이 미국을 택한다면, 즉 사드 배치를 강행한다면, 중국으로부터 계속 정치경제적 보복을 당할 것이다. 한국이 중국을 택한다면, 즉 사드 배치를 철회한다면, 미국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것이다. 즉, 한국은 어떠한 경우든 불이익을 얻게 된다. 두 가지 관점에서 해결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이익형량의 관점이다. 어떠한 경우가 한국에게 더 이익인지 혹은 불이익인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명분의 관점이다. 어떠한 경우를 택하는 것이 한국에게 더 그럴듯한 명분을 줄 수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첫 번째 관점, 즉 이익형량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은 현재 중국의 보복보다 미국의 보복을 더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경제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한국은 미국에 아주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로써 곧 한국은 미국을 선택해야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현재의 상황을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변화까지도 예측하고 고려해야 한다. 중국은 지금 미국에 비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강대해지고 있다. 향후 한국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미국에 대한 의존도보다 높아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현재로서는 이익형량의 관점에서는 명료한 결론을 도출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관점, 즉 명분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역시 명료한 결론을 도출하기는 어렵지만 결론적으로는 중국의 편을 드는 것에 더 그럴듯한 명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중국은 한국에 대한 보복에 착수해 있고 실제로 한국은 경제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 한국은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대하여 미국에 호소하며 사드 문제를 다시 논의하자고 간청할 수 있다. 반대로 한국이 미국의 편을 든다면 딱히 중국에게 둘러댈 수 있는 그럴듯한 핑계거리가 없다. 한국이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에 사드를 배치하게 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한국에 어떠한 보복을 가할 것이므로 한국은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드 배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중국에 대하여 큰 호소력이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현재 미국이 한국에 대하여 어떠한 제재나 위협을 가하거나 정치경제적인 경고를 하는 등의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미국은 현재 중국의 한국에 대한 보복을 비판하고 있는데, 만일 한국이 입장을 바꾸어 중국의 편을 든다고 하여 미국이 한국에 보복을 가한다면, 이는 미국이 스스로의 위신을 깎는 결과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이 중국의 편을 드는 것으로 입장을 바꾸었을 때 미국이 곧바로 한국에게 보복을 가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정리해 보면, 사드 문제는 결국 한국이 중국과 미국 중 누구를 택할 것인지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중국과 미국 둘 모두를 잡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 현재 한국 정부는 너무 무능해 보이고 그것이 실현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다. 한국이 중국과 미국 중 누구를 택할 것인지의 문제는 두 가지 관점, 즉 이익형량의 관점 및 명분의 관점으로 각각 접근해 볼 수 있다. 현재로서는 이익형량의 관점에서의 결론을 도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명분의 관점에서는 중국을 택하는 것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지금 미국은 중국의 한국에 대한 보복을 비판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명분의 관점에서 한국에게 사드 배치를 철회할 요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미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증가됨에 따라 한국에 사드를 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군사전문가가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언뜻 생각했을 때 사드는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인데, 북한이 바로 옆에 있는 남한을 공격할 때 굳이 높은 고도로 미사일을 쏠 것 같지는 않다. 즉, 사드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것 같은 느낌도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한국에게는 명분이 있으니 한국 정부가 미국에게 사드 배치 문제를 다시 논의해 보자고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7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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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수 없다

우주 2017. 3. 12. 16:31

글을 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살아오면서 문득문득, 글을 써야겠다는, 더 정확히는 무언가를 밖으로 표현해야겠다는 의지나 욕구가 생기곤 하였다.
그 의지나 욕구가 게으름을 압도할 때 나는 글을 썼던 것 같다.
나는 지금 그런 의지나 욕구가 없다. 요 근래에는 계속 없었고, 이렇게 오래도록 없었던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그리고, 그래서. 지금 쓰고 있는 이것은 사실은 글이 아니다.
예전에도 나는, 내가 쓰는 것에 감히 '글'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어서, '글 같은 것'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나는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다.
글을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책도 거의 읽지 못하고 있다.
수동적으로 있어도 주어지는 자극과 정보들에 휩쓸리면서 넋을 놓고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짧은 한탄을 해 본다.


2016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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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우주 2012. 5. 1. 17:03

바로 어제 한 생각들이 하루만큼 저만치 가 있고.

나는 어제의 것들을. 오늘로 데리고 오려다.

차라리 어제의 것들과 비슷한 것들을 새로 만들기로 한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

자꾸 새로움을 찾으려 했을까.

과거가 두려운 것이냐, 미래가 두려운 것이냐.

나는 과거를 살지도, 미래를 살지도 않는다.

나는 과거를 산 적도, 미래를 산 적도. 없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두려워 했나 보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두려워 하며 살아왔나 보다.

 

나는 미래를 살지 않겠다.

그리고 나는 지금, 두려움조차 사랑하겠다.

지금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

나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겠다.

그저 지금.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

사랑한다.

 

2012 4 16

 

 

외로움의 본질은 어쩌면 깊음에 대한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저 아래 아득한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끝까지 내려간다고 별 탈 없겠지. 어쩌면 그곳에는 지금 여기보다 훨씬 더 좋은 세상이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곳은 어둡지 않은 곳일 수도 있다. 빛의 근원일 수도 있다. 두려워 말자. 외로워 말자. 그저 중력에 몸을 맡기자. 가라앉고 가라앉아 밑으로 내려갈 수록 나는 오히려 더 밝은 세상을 보게될 것이다. 끝없이 추락하면서 나는 늘 설레자.

 

2012 4 15

 

 

우물 안을 들여다 보니

그 속에도 해가 있네.

우물 속의 해는

수줍게 빛을 내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저 위에도 해가 있네.

하늘 위의 해는

눈이 부셔 바라보기 힘드네.

나는 우물가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우물 안을 들여다 보네.

그 속에는 해가 없네.

 

2012 3 13

 

 

에너지가 많이 투입되는 것이 곧 높은 성과를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적은 양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것은 오히려 해가 된다. 대부분의 경우 부족이 아니라 과잉이 문제가 된다. 나도 모르게 힘을 줄 때가 많다. 이는 곧 과잉이다. 몸은 그저 거들 뿐이다. 아주 작은 힘만으로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아주 작은 에너지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방주를 넓히는데 이용하자.

 

2012 3 8

 

 

훗날, 더 이상 연습이 필요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게 되기를 소망해 보기도 하지만, 지금은 늘 연습을 해야할 시기이다. 모든 것이 다 잘 풀리지 않음에, 때때로 스스로가 만드는 부자연스러움에 안타까워 하지 말자. 그저 모든 것이 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나는 지금 새롭게 태어나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낯설게 느껴지는 것, 익숙하지 않은 것, 새로 배워야 할 것, 느껴야 할 것들이 많으며,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런데 어쩌면 앞으로도 항상 그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보아야 할 것을 항상 바라보면서 그것에 집중하다보면 모든 것이 물 흐르듯 풀려갈 것이라 믿는다.

 

2012 3 8

 

 

가라 앉히고. 느리고. 가벼웁자.

세상에 무거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지 않던가.

무거움도. 추위도. 떨림도. 내가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가벼움도. 따스함도. 느림도.

만들 수 있다.

또한 나는 변화할 수도 있고. 변화를 만들 수도 있다.

 

2012 3 6

 

 

아주 많이 느리게 살아보자. 멈춤에 가까울 정도로. 그래도 사는데 별 탈 없을 것이다. 느려지기 위하여 다소의 노력이 필요하다. 늘 느림을 생각해야 한다. 느림을 항상 머리 위에 두자.

 

2012 3 5

 

 

머무르려 하는 것들

애써 떠나게 하고

오래도록 그 빈 자리를

허탈하게 바라본다.

 

다시 찾는 이 없나

두리번 거려 보지만

빈 자리만 자꾸 커져간다.

 

훗날 누군가 찾아와 머무르려 하면

나는 또 그를 떠나 보내겠지.

그리고 오래도록 빈 자리만 바라보겠지.

 

2012 3 1

 

 

열정.

힘든 일도 즐겁게 만드는 것.

 

글을 쓰면, 글씨를 적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동안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은 차선책이다.

 

졸리운 표정 너머로 참 넓은 세상이 있다.

나의 얼굴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2012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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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문예 낙선작

우주 2010. 1. 17. 20:57

2007년 가을 어느 날에 적은 글이다. 당시 군복무를 하고 있던 나는 부대에서 주관하는 장병문예에 응모하여 포상휴가를 타낼 목적으로 이 글을 적었다. 결국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낙선하였다. 할당된 지면이 적어 긴 글은 제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설로는 응모할 수 없었고, 시나 꽁트, 짧은 수필 정도가 응모 가능한 장르였다. 당선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교훈적인 내용을 듬뿍 담은 수필이었다. 그리하여 나도 그런 류의 글을 적어 제출하였다. 순수하지 않은 의도가 개입되어 있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거짓된 마음을 담지는 않았음을 밝혀둔다. 이하 그 전문이다.


지난 오월 말. 군생활에서 두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유격 훈련을 받았다. 오일의 훈련 기간 중 셋째 날인가 넷째 날이었을 거다. 훈련장에 올라가서 기구를 타기 전에 PT체조를 하고 있었다. 유격을 받아 본 사람을 알겠지만 유격 훈련 중에는 조교나 교관이 교육생들의 행동을 사소한 것 하나까지 철저하게 통제한다. 지시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다가 걸리면 따로 분류돼 더 강도 높은 훈련이나 얼차려를 받기 마련이다. 지시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다. 예를 들면, PT체조를 할 때 교육생들이 집중해서 하게 하기 위해 마지막 동작에는 구호를 붙이지 말라고 하는데 혹 누군가가 부주의하여 마지막 동작에 구호를 붙였다면 그도 지시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PT체조를 할 때는, 하나의 동작이 끝나면 차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대기해야 한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PT 일번을 몇 회 반복해서 하고난 뒤였을 거다. 방탄헬맷 끈을 조금 헐렁하게 맨 상태에서 계속 뛰는 동작을 하다보니 헬맷이 심하게 비뚫어져 내 눈을 가렸고 매우 불편했다. 나는 부동자세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너무 불편해서, 그리고 이 정도는 참작해 주겠지 하는 마음에 손을 올려 헬맷을 고쳐 썼다. 그러다 조교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한 번만 봐달라는 의미로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역효과가 난 모양이다. 조교는 뭐가 웃기냐며 화를 냈고 나를 열외시켜 PT 팔번 준비 자세를 취하라고 했다. PT 팔번 준비 자세는 양 팔을 벌리고 누워서 고개와 다리를 사십오도 정도로 들고 있어야 하는 매우 힘든 자세로 그 악명이 높다. 조교는 얼차려의 의미로 나에게 계속 그 자세로 있으라고 지시했다. 힘들었다. 고개가 계속 내려오고 다리는 자꾸 꺾였다. 화가 났다. 그냥 넘어가도 됐을 일을 왜 굳이 짚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거야. 조교는 꼭 교육생들한테 악감정이 있는 것 같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런 모욕을 준 저 놈(?)에게 복수할 수 있을까. 나는 땀을 흘리며 분노로 가득한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길고 긴 - 힘들어서 실제보다 훨씬 길게 느껴진 - 시간이 흐른 뒤 얼차려가 끝났다. 여전히 화가 난 상태로, 다음 코스로 이동하려는 찰나였다. 조교의 뒷모습을 보았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거기서 무언가 씁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조교의 입장에서 했을 법한 생각들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많은 수의 교육생을 통제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만일 통제에 따르지 않는 교육생을 보고도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될까. 그 교육생은 적당히 통제에 따르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는 판단을 하고 앞으로 또 통제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 또 그것을 다른 교육생들이 알았다면, 다음에 통제에 불응하는 누군가를 지적하여 조치를 취하려고 할 때, 누구는 봐주면서 왜 자기한테만 그러냐는 불만이 나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전체적으로 훈련 통제가 어려워 지고 훈련의 질마저 떨어질 지도 모른다. 조교의 입장에서 볼 때 나에게 얼차려를 준 일은 하나의 본보기를 보여 이 후에는 또 그렇게 통제에 불응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훈련을 위해서 꼭 필요한 적절한 조치였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마음이 누그러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계속 화가 나 있었을텐데.

다음은 낙하 연습을 위한 기구를 타는 코스였다. 계단 - 계단이라고 하기에는 좀 가파르지만 - 을 한 칸씩 밟고 올라가서 꼭대기에 도착하면 뛰어내리는, 그런 연습을 하는 코스였다.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유격"이라는 구호를 외쳐야 하고 꼭대기에 도착해서는 양 팔을 벌리고 서서 "유격대"라고 더 크게 외쳐야 한다. 목소리가 작으면 얼차려를 받기도 한다. 내 차례가 되었다. "유격"을 외치며 한 칸씩 올라가는데 "교육생, 목소리 더 크게 냅니다!" 하는 조교의 말이 들렸다. 평소의 성격대로였다면 거기에 반감이 생겼을테지만 좀 전에 했던 생각들 때문에 그런지 조교의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있는 힘껏 목소리를 냈고, 꼭대기에 올라서는 낼 수 있는 최대한 큰 목소리로 "유격대"를 외쳤다. 그리고 뛰어내렸는데 조교가 열심히 했다고 칭찬하면서 열외해서 조금 쉬고 있으라고 했다. 원래는 기구를 타고 나면 PT체조를 해야 했다.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격 훈련을 받으면서, 잠시 사이에 불량 교육생이었다가 모범 교육생이 되는 경험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유격은 단체로 하는 훈련이다. 모두가 다 훈련을 제대로 받기 위해 각 개인들은 때때로 개인적인 욕구들을 자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훈련 전체가 엉망이 된다. 목이 마르다고 아무 때나 물을 마시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모두 제각각 행동하게 되고 단체는 그 목적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즉, 단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개인의 희생이 필요하다.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 잘 알고 있던 말이지만 나는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잘 모르고 있었나보다. 유격 훈련 중의 경험으로 그 참 뜻을 깨닫게 되었다.

군생활은 단체 생활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생활을 하는 각 개인들은 군대라는 단체를 위해 필요한 만큼의 희생을 해야 한다. 사회에서는 허용되지만 군대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어떤 한 병사가 취침시간 이후에 잠은 안 오고 친구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서 막사 밖으로 나가 전화를 하고 싶은 상황이라고 하자. 그 병사는 자기만 잠깐 나가는 것은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는 탈영할 염려도 없으니 그러는 일이 괜찮다고 여긴다. 다만 당직사관에게 걸리지 않는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전체를 보지 않고 개인적인 시야만 갖는다면 충분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단체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 전체와 그 목적을 헤아리는 넓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 자기가 그렇게 통제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되면, 그리고 그것이 걸리지 않고 무사히 끝났거나 암묵적으로 허용된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도 앞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통제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것은 곧 군기강의 해이로 이어진다. 조금 심각하게 부풀리자면, 그로 인해 우리 군의 전투력이 약화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군 본연의 목적마저 타격을 입게 된다.

군 조직과 국가를 위해서 우리 구성원들은 모두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군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가끔 불만을 가질지언정, 여러가지 통제와 자신의 성향에 맞지 않아도 해야되는 일들 때문에 힘들지라도 모두 묵묵히 견뎌내고 있다. 한명 한명 놓고 보면 보잘것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넓게 보면, 군대는 국가를 위해 꼭 필요하고, 한 명의 군인은 그 구성원으로서 군대를 유지시키고 있으니 그는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중요한 사람이라고 본다.

후대까지 길이길이 남을 뛰어난 작품을 만든 예술가나 사회를 더 윤택하게 해줄 획기적인 발명품을 개발한 연구가를 사람들은 위대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은 위대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잘 모르고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위대함이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묵묵히 참고 견디는 삶의 위대함이다. 우리 어머니들은 스스로도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평생을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신다.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를 낮추고 버리는 그런 희생이야 말로 진정한 위대함이 아닐까.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긍지를 갖고 매순간 즐겁게 일하고 생활하는 군인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군생활을 하면서 힘듦과 어려움을 많이 겪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참고 견디며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우리 국군 장병은 모두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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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기

우주 2009. 11. 28. 20:57


마음이 떨려도 떨리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가 물 밑에서는 급하게 발을 휘젓는 것처럼 마음이 아무리 불안해도 겉으로는 완전한 태연함을 보일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래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나폴레옹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거라 했지만 사실은 확신을 가진게 아니라 확신하는 모습을 겉으로 나타낸 것 뿐일지도 모른다. 그도 사람인데 자신이 하는 일에 불안해 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었을까. 다만 그는 불안을 철저하게 외부로 드러내지 않았다. 굳은 의지와 신뢰만 바깥으로 비췄다.

불안한 사람이 불안한 사람을 따를까. 불안함은 확실함을 좇는다. 확실함은 ... 없다. 다만 확실해 보임이 있을 뿐이다. 불안은 얼토당토한 확실이라도 좋아한다. 사람들이 자유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에 구속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마음이 떨려도 떨리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사람은 외로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은 고독을 알아야 한다. 외롭기 싫은 사람은 무언가의 구속을 원한다. 고독을 아는 사람은 자유로울 수 있고 세상에 믿음을 줄 수 있다. 사람을 이끄는 사람은 고독하다. 떨림을 떨리지 않음으로 보이는 게 고독일까.

고독을 모르는 사람들은 떨림을 떨리지 않음으로 보이는 사람, 즉 고독한 사람을 따른다. 나폴레옹은 고독한 사람이었다. 고독한 사람은 고독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우아한 백조, 굳은 금강석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떨림을 잘 안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

고독은 고독을 알아본다. 세상에는 고독한 사람들의 세상이 있다.


2007년 7월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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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우주 2008. 12. 5. 23:37
오늘은 그냥 마음가는대로 이야기를 해볼까해요. 사실 이런 류의 글은 이 카테고리에 들어와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우주 얼음 성냥 낙타.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이름을 붙였지만 지금은 분류에 나름대로의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있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좋아했었어요. 나는 그 사람도 좋아했었어요. 나는 그 때 그 사람도 좋아했었어요.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을 만나려고 했었어요. 그 사람도 만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 때 그 사람은 만나려고 했었답니다. 나는 왜 만나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그 만남이 나를 만나는 만남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냥 나를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담 나는 이제 그 사람을 만나지 않겠어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말이 나에게는 실로 엄청난 결단을 내리게 하고 있습니다. 아, 모처럼의 정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참, 먼저 해야될 말이 있었는데, 그 말부터 해야겠네요. A야, 미안하다. 나중에 때가 되면 꼭 연락할게. 나 하나도 잊지 않고 있어. 내가 진 빚, 반드시 갚을게. 그리고 J야, 또 P야, 나중에 내가 찾아갈게. 혹시라도 섭섭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이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지금까지 나에게 그저 나 자신을 만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만나게 해 주고 싶습니다.

나는 이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같은 별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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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미안해요, 아줌마'라는 제목으로 제천역 안에 있는 약초 가게에서 차를 팔던 아주머니에게 나보다 늦게 온 사람들한테 차를 먼저 준 데 대해 항의했던 일에 미안함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 짧은 글을 적었었다. 지금 그렇게 미안함을 표시했던 것을 취소하려고 다시 글을 적는다. 자꾸 사소한 일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내 모습이 속 좁은 사람의 그것처럼 비추어질까 하는 생각이 슬몃 들어 이 글을 계속 이어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솔직함을 표현한다는 것과 이 사소한 일에 대한 미안함의 철회라는 지극히 소소한 일이 무언가를 시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그냥 쓰기로 한다. 나쁜 관행은 없어져야 마땅하고, 비록 늦게 온 손님에게 먼저 온 손님보다 단지 나이가 조금 더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차를 먼저 준 약초가게 아주머니의 행동처럼 사소한 경우일지라도 예외가 적용될 수는 없다. 이는 불합리한 차별이고, 오히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어지는 커다란 문제들보다 더 문제가 있는 경우일 수도 있다. 사소한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이 별 것도 아닌데 그냥 넘어가면 되지, 트집 잡아 뭐 하랴, 하는 생각을 할테고, 그렇기 때문에 집고 넘어가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잘못된 관행이 계속 되풀이 된다. 이런 까닭으로 타파되어야 마땅한 악습이 계속 남게 된다. 조금 더 큰 사안을 예로 들어 보겠다. 시청에서 민원을 처리하는 직원이 이용자들에게 단지 자신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하는 데 십분 정도가 소요되는 규정에 없는 신청서를 작성토록 하고 있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것이 없더라도 그 직원은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별 문제가 없으며, 이용자들은 그것 때문에 민원을 접수하는데 다소의 불편함을 겪는다. 이용자들은 그렇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데, 시청에 민원을 접수시킬 일이 일생을 통틀어 몇 번 되지도 않아서 그 실익이 적을 뿐더러 불편한 십여분을 감수하는 일이 이의를 제기하기 보다 수월하고 막연히 누군가가 한 번 쯤 나서겠지 하는 생각들이 겹치기 때문에 그렇다. 작은 일이라도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에는 불쾌감이나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인간적이 배려만이 능사가 아니다. 때로는 자기가 나서기도 해야 한다. 단순히 네가 불쾌감을 느낀 일 아니냐, 뭐 그걸 복잡하게 생각하느냐, 자기 합리화 아니냐, 이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맞다, 고 대답한다. 그리고 지금의 이 미안하다고 했던 것 취소에 대한 취소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 후에 생겨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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