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갈까

성냥 2017. 6. 20. 00:18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기가 조심스럽다.

누군가에게는 절절하게 와 닿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 말로부터 큰 위로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감히 마음에 안 드네 어쩌네 할 처지가 될까.

그래도 나는 오래 전부터 꾸준히 이 말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나의 이 의문을 고백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누군가가 꿈에 그리던 곳으로 여행을 갔다.

그곳은 그가 상상했던 것과 다소 다르기는 했지만, 그는 그곳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리 길지는 않은 여행이지만, 그는 여행을 충분히 즐기고 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건 어쩐지 이상하다.

여행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어떤 이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여행이라고.

우리의 삶이 여행인데, 삶이 지나가야 할 그 무엇이 되어야 할까.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견디고, 버티는 것이 인생일까.

그렇다면 이건 너무 이상하고 부당하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존재하게 되었고, 자신이 정하지 않은 이름을 부여받고,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꽤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우리는 경주를 하듯이 살면서, 그저 이 시기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견디고 버텨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인생의 본연이라면, 나는 너무도 억울할 것 같다.


그래도 지금 큰 고통에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말이 큰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보다는, 고통을 그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그 무엇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고통에 어떤 깊은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의미를 남기는 것이면 좋겠다.

기왕이면 아름다운 어떤 것으로 승화되었으면 좋겠다.


조금 더 솔직한 것을 말해보면, 나의 경우 고통에 직면했을 때, 고통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면 오히려 고통이 더 커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실용적인 측면에서의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가 아무런 소용이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쩐지 미안하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나는 고통이 지나가야 할 어떤 것이 되기 보다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간절하게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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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

얼음 2017. 6. 6. 19:09

그리워.

내가 태어나기 전의 시간들이 그리워.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그리워.


아빠의 소년 시절이 그리워.

80년대의 신촌이 그리워.

90년대의 일산이 그리워.


내가 너를 알지 못하던, 너의 어린 시절이 그리워.

너의 기억들이 그리워.

너의 그리움이 나는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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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쓰기

우주 2017. 6. 3. 00:29

올해가 몇 년인지,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애써 생각하지 않으면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누군가는 내가 이런 말을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생물학적인, 또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나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내가 무슨 다른 말을 할 목적이나, 구체적이거나 체계화된 생각을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문득 들었던 생각을 한 번 이야기해 보는 것일 뿐이고, 이것은 뒤에 이어질 이야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순간 강하게 떠오른 생각을 언급하지 않으면, 그 이후의 또는 그 이외의 이야기는 가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이 얘기는 조금 더 그럴듯하게 말해보면, 나에게 있어서 시간에 대한 관념이나 인식 또는 느낌(느낌이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이 이상해 질 때가 많다, 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공간에 대한 느낌이 이상해 질 때도 많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이 진짜인지 아닌지에 관한 의문이 생길 때도 있다. 갑자기 시공간의 현실감이 없어지는 느낌. 누구나 살다보면 그런 느낌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트릭스나 인셉션 같은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사람은 더욱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술을 마셨을 때의 느낌이 그런 느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덧붙이자면, 이것은 아주 맑고 집중된 마음상태에서 경험할 수 있는 느낌일 수도 있다.

 

가끔은, 이건 도대체 말이 되지 않아,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아니, 그런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 때가 있다. 사람은 자기가 한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상당히 많을 수도 있다. 특히, 어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의 경우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또는 자신은 선택이 불가능했던 상황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출발점을 외면하고, 그 이후의 일들에 관하여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살아가라고 하면, 나는 어쩐지 이상하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그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은 결과적으로 나쁜 사람들을 옹호하는 생각이 될 수도 있다, 라는 등의 반박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지금은 그런 사회적인 맥락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냥 개인적인 감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에게는, 지나치게 개인들에게 책임을 묻는 사회가, 세상이, 어쩐지 너무 가혹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겉으로 보기에도 힘들어 보이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겉보기에는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 많이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힘들게 사는 것이 자기 자신의 책임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다른 누군가가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힘든 건 너의 책임이니까 불만을 갖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어쩐지 그건 너무 비정한 것 같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힘든 시기를 불안과 걱정을 밑천으로 하여 살았다고, 버텨냈다고 한다. 나는 그 말로부터 위안을 얻었다. 아름다운 말이었다. 불안과 걱정을 밑천으로 삼다니. 나도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그 말이 나의 깊은 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작은 떨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내 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불안과 걱정까지 밑천으로 하여 살아야 하는 삶이라니. 버텨야 하는 삶이라니. 삶은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이건 도대체 말이 되지 않아. 삶은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런 표현을 내놓기 전에 많은 시간을 망설였다. 내가 이런 표현을 해도 좋을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표현이 나의 것인지, 나의 것이 될 수 있을지를 잘 모르겠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것만을 사용하여 글을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글은 내가 썼더라도 나의 글이 아니다. 어떤 표현이 나의 것인지 아닌지는 나만 알 수 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은 솔직하고 용감해야 한다. 그런데 특히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은 가장된 솔직함, 가장된 용감함이다. 근원이 가짜라면 아무리 진짜처럼 보이려 애를 써도 결국에는 가짜일 뿐이다. 나는 진짜만을 말하고 쓰고 표현하고 싶다.

 

예전에 나는, 내가 외롭기가 싫어서 자꾸 글을 쓰나 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도 비슷하다. 나는 그냥은 견디기가 힘들 때 글을 쓰거나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진짜를 표현하고 싶다. 진짜가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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