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26

성냥 2017. 3. 26. 23:28

어젯밤 소주를 조금 마시고, 새벽 한시가 조금 넘어서 잠이 든 걸로 기억한다. '나의 쓸모'라는 제목으로 적은 짧은 글은 술기운 속에서 적은 글이다. 그런데 뜻밖에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나는 일곱시가 조금 넘었을 때 비교적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이 맑은 정신상태와 좋은 컨디션으로 무엇을 할 지를 잠깐 고민했다. 평소의 습관대로였다면 티브이를 틀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좋은 상태로 티브이를 보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고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독일어를 공부했다. 즉, 나는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독일어를 공부한 것이다. 공부가 꽤 잘 되었지만, 나는 곧 배가 고파졌다. 컵라면과 어제 먹다 남은 치킨을 먹었다. 아침부터 컵라면과 치킨이라니. 나는 티브이를 보면서 컵라면과 치킨을 먹었는데, 무슨 프로를 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말이다.


낮에는 잠깐 카페에 다녀왔다. 어제 스웨터만 입고 밖에 나갔다가 너무 추워서 금방 다시 들어와 패딩을 입었던 기억이 있어서, 나는 오늘은 처음부터 겨울용 패딩을 입고 나갔다. 그래도 날씨는 꽤나 쌀쌀했다. 내가 유난히 추위에 약해서 그런 것일까. 밖에는 봄옷이나 얇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추울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들의 옷차림은 3월 끝무렵이라는 시기의 옷차림으로서 적절해 보이기는 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제 곧 4월이라고 하더라도, 추우면 따뜻하게 입어야 하는 것 아닐까. 즉, 옷을 입음에 있어 기분보다는 실리를 따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 그들은 이상하게 따뜻한 날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날이 한겨울에 속한 날이었다면 유행하는 롱패딩을 입고 다녔을 것이다.


나는 종종 혼자 카페에 가서 책을 읽거나 독일어 공부를 한다. 그러다가 나는 카페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한다. 물론 대놓고 관찰하는 것은 아니고, 거의 티가 나지 않는 노련한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나처럼 카페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반면, 카페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많다. 외국어 공부나 전공과목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보다는 공무원 시험 등 취업을 위한 시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가끔은 수능 공부를 하는 고등학생들도 있다. 요즘은 노트북을 들고 와서 자소서를 쓰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다들 치열하게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내가 그러한 치열한 상황에서 벗어나 있음에 안도감을 느낄 때도 있다.


물론 카페에는 대화를 하거나 수다를 떨기 위해 짝을 지어 오거나 끼리끼리 오는 사람들도 많다. 연인 사이이거나 썸남썸녀 사이로 보이는 일행들도 많은데, 그들의 대화 내용은 대체로 잘 들리지도 않고, 들었다고 하더라도 거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 대개 남자들끼리의 수다나 여자들끼리의 대화가 귀에 잘 들어온다. 남자들끼리의 대화 내용은 주로 취업 문제에 관한 것이 많다. 느낌상 9할 정도가 그런 것 같다. 여자들끼리의 대화 내용은 역시 취업 문제에 관한 것이 많다. 그런데 9할까지는 아니고 3, 4할 정도가 그런 것 같다. 또한 여자들끼리의 대화 내용은 남자에 관한 것이 많다. 역시 3, 4할 정도가 그런 것 같다. 여기서 그럼 남자들끼리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는데, 결론을 말하면 카페에 오는 남자들끼리는 거의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주관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므로 보편적인 경향이 그러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내가 주관적으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카페에 온 여자들끼리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개중에는 꽤 수위가 쎈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 분도 있다. 예를 들면 남자와의 스킨쉽에 관한 이야기인데, 역시나 그런 얘기는 내 귀에 쏙쏙 들어온다.


카페에 다녀온 나는 잠깐 낮잠을 잤다. 어렸을 적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큰 공허감 내지는 두려움을 느끼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느낌은 너무나 강렬했다. 아마 그것은 기억이 없는 영아 시절에 있었던, 잠에서 깼을 때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것을 알게 되면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어떠한 생존 본능에 따른 습성이 이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또는 전생의 끝무렵에 내가 느꼈던 감정이 그 순간 되살아난 것일 수도 있다는 상상도 해 보았다. 요즘도 가끔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물론 그 정도는 어렸을 적의 그것보다 훨씬 작고 미약하게 남은 여운 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주 오래전에 경험했던 그 공허감을 주로 후각적인 느낌으로 느낀다. 오늘도 낮잠에서 깼을 때 아주 살짝 그 느낌을 냄새 맡았다. 그리고 나는 일요일 오후가 지나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은 일요일 밤이다. 예전에는, 직장생활을 할 때에는, 일요일 밤에 우울함이나 슬픔을 느낄 때가 많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후에 잠깐 맛보았던 공허감도 아름다움 속에 놓아둘 수 있다. 일요일 밤은 더욱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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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쓸모

성냥 2017. 3. 26. 00:31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 말에 반대한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매우 위험한 말이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 쓸모는 누구를 또는 무엇을 위한 쓸모일까. 크게는 국가나 사회, 또는 인류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작게는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 조직이나 회사, 또는 가족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임마누엘 칸트가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일 지라도. 내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나를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으로 취급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서로 충돌한다.


위 두 가지 명제의 충돌에 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를 선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후자를 떼어 놓고, 즉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완전히 배제하고 전자만을 놓고 본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꽤 그럴듯 하다. 다른 명제와 나란히 놓고 보면 문제가 있음이 드러나는 명제가, 독립적으로 떼어 놓았을 때 그럴듯 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세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사실 나는 사람이 하는 모든 생각은 세뇌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는 매우 복잡미묘한 문제이고 이 글의 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이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와 방법으로 세뇌가 이루어져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이유에 의한 것인지, 또는 어떠한 목적을 위한 것인지는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뒤집어 보면 된다. 즉, 사람을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 내지는 이용하기 위하여 그러한 세뇌가 이루어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또는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하는가. 대체적으로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회사나 조직, 또는 국가를 위한 수단이 된다(가족을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이는 다른 것들과는 좀 다른 문제가 된다. 기꺼이 가족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꽤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족에 관한 이러한 문제 역시 매우 복잡미묘한 문제이고 이는 이 글의 줄기와는 걸맞지 않는 논의이므로 더 이상 논하지는 않겠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구조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이에 대하여 큰 저항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알게 모르게, 자연스럽게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세뇌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국가나 사회 또는 조직은 추상적인 존재이다. 개개인의 사람들처럼 구체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국가나 사회 또는 조직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수단이 되도록 하는 방향으로 세뇌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추상적인 국가나 사회 또는 조직으로 인하여 커다란 이익을 얻는 소수의 구체적인 개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국가와 사회 위에 군림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국가 또는 사회를 매개로 다수의 사람들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수의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보편화될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의 방향성을 조정하거나 이를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유도한다. 그들에게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


앞에서 나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세뇌가 이루어져 왔는지는 잘 모른다고 하였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이를 추론해 볼 수는 있다. 애국심과 성실함, 정직함, 직업에 대한 소명감 등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의 분위기,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가를 높게 대우해 주는 풍토, 인내심과 순종심이 있어야 잘 적응할 수 있는 학교생활과 조직생활의 모습 등에서 세뇌가 이루어져 온 방식을 조금씩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언뜻 생각하면, 사람을 많이 존중하여야 한다,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면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냥 친절하게 잘 해주면 되는 것일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명제의 방향성이다. 사람은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외부를 향한 것일 수도 있고 내부를 향한 것일 수도 있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나 자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일단 이것이 먼저 해결되어야 다른 사람에 대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내 삶의 목적을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 나는 고(故) 신해철이 했던 말에 크게 공감한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 이미 그 목적을 이룬 것이다. 남은 인생은 덤으로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즐기면서 살면 된다.


기분 좋고 호방한 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정말 쉽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한데 어떻게 인생을 즐길 수 있겠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겉보기에 거의 동일한 삶을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내면에 어떠한 생각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존엄하다. 그 쓸모를 따질 수 없고 따져서는 안 된다. 사람은 그 자체로 어떠한 목적이다. 그런데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미 그 목적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할 일은 남은 삶을 즐기는 것뿐이다. 나는 우리네 삶은 그 자체로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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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23

성냥 2017. 3. 24. 00:32

낮에 봄햇살을 맞으면서 좋은 기분을 느꼈고, 그 느낌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공책에 짧은 글을 적어보았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내가 쓸 수 있는 단어와 표현이 퍽 적다는 것이었다. 내가 읽어서 그 뜻을 안다고 하여 그 단어가 나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나는 책을 읽다가 '꾸덕꾸덕'이라는 말을 보면 그 뜻을 안다. 그렇지만 글을 쓸 때 나는 '꾸덕꾸덕'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 그것은 아직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순간부터 '꾸덕꾸덕'은 나의 것이 된다. 이제부터는 글을 쓸 때도 그것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열린 사람과 닫힌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는 열린 사람이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닫힌 사람이 된다.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여 꼭 그 사람에 대하여 열린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고, 우연히 한 번 본 사람이라고 하여 꼭 그 사람에 대하여 닫힌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에 대하여도 닫힌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우연히 한 번 만난 사람에 대하여도 열린 사람이 될 수 있다. 마음 속 깊숙이 있는 빗장을 여는 일은 나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는 방법과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나는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열린 사람이 되고 싶다. 가끔 내가 닫힌 사람으로 있을 수밖에 없음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다. 많은 경우,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도 나는 여전히 닫힌 사람인 채로 존재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식의 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틀로만 사람을 분류하고 판단하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모두가 닫힌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을 분류하고 판단하려 한다. 내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나에게 열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마음을 썼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앞으로는 내 주변 사람들이 열린 사람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노력해야겠다, 뭐 이런 류의 교훈적인 말을 하려는 건 절대로 아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내 마음 하나 추스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아주 가끔, 아주 우연스럽게 누군가에 대하여 열린 사람이 된다. 그때 나는 매우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꾸덕꾸덕 마른 땅 위에 촉촉하면서도 시원하게 단비가 내리는 듯하다고나 할까.

Posted by ma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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