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성냥 2017. 3. 14. 00:01

글에 제목을 붙이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제목 없음'이라는 제목을 붙여 본다.

이것이 제목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컨디션이 좋을 때 글을 쓰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하니까 도통 글을 쓸 수가 없다.

집중하기 좋은 고요한 주변상태를 만들어 놓고 글을 쓰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하니까 도통 글을 쓸 수가 없다.

좋은 글을 쓰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하니까 도통 글을 쓸 수가 없다.


지금 나는 너덜너덜 피곤한 상태이고, 앞에는 티브이를 틀어 놓고 있고, 좋은 글을 쓸 생각도 없다.

무언가 표현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자신은 없다.

그것은 아주 미묘하고 민감한 것이라, 여간해서는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

지금까지는 서설이었고,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계절이 바뀜을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느끼면서, 나는 불현듯 불안감을 떠올렸다.

나에게는 지난 계절의 평온이 있었다.

겨울 속에서 나는 아주 안정되어 있었다.

그 상태가 계속되기를 바랐다.

나는 아주 보수적이었다.

관성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싶었다.


봄을 느끼면서 나는 흔들림을 느낀다.

겨울의 마음으로는 쉬이 봄을 살아갈 수 없음을 안다.

새롭게 봄의 마음을 심고 물주어 싹을 틔우고 잘 자라도록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

나는 봄의 평온을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또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오겠지.

나는 여름 앞에서 또 불안을 마주하겠지.

나는 가까스로 여름의 평온을 맞이하겠지.

그런데 또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겠지.

나는 가을 앞에서 또 불안을 마주하다가 가까스로 가을의 평온을 맞이하겠지.

그런데 또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오고, 나는 겨울 앞에서 또 불안을 마주하다가 가까스로 겨울의 평온을 맞이하겠지.

그리고 또 봄이 오겠지.


사실 내가 느낀 것은 설렘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설렘을 느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Posted by ma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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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

성냥 2017. 3. 12. 16:43

예전에 적었던 글입니다.


고통은 좋은 것이다. 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지만, 고통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라는 정도로는 생각한다. 고통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심해지기도 하는 이유는 고통을 나쁜 것이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빨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고통에 빠져 있는 자신의 상황을 나쁜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 일단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면, 역설적이게도 점점 더 고통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고통은 사라진다. 그러나 그 순간의 고통이 너무 크면, 시간이 흐르기 전에 그 고통으로 인하여 삶이 끝날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고통의 정도를 생각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거나 그러한 생각을 버리고 먼저 그 고통을 온전하게 받아 들여야 고통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에게 직면한 고통을 정면에서 응시하기는 누군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에게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차선책을 생각하여야 하는데, 나에게 그 차선책은 고통을 그리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이다. 나는 일단 나에게 찾아온 이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것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겠고, 또 이것을 없애고 싶어 어설프게 건드려본 결과 이것이 오히려 더 크고 견고해졌다.


나는 고통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므로, 우회적으로 고통을 끌어안고 있는 나의 상황을 약간 먼 거리에서 바라보듯 인식하기로 하였고, 그러한 나의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로 하였다.


고통에 빠져 있는 나의 상황은 그리 좋지도 않지만, 나쁘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고, 또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의 이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나는 미래에 또 이와 유사한 고통에 빠질 것이고, 나는 분명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을 것이다. 나의 삶에서 때때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일어날 이러한 상황을, 나는 나의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의 이 커다랗고 정체불명인 고통을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고통에 빠져 있는 나를 스스로 좋아할 수는 있다. 고통이야 커지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겠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는 별개이다.


2015 2 2

Posted by ma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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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정리

우주 2017. 3. 12. 16:40

요 며칠 했던 산만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시공(時空)


시간이 멈추면 어떻게 될까.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간이 멈춘 장면을 보게 된다. 주인공의 시간만이 멈추지 않고, 주인공은 신기해하며 정지 상태로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 사이에서 혼자만 움직인다. 만약 정말로 시간이 멈춘다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장면과 비슷한 상황이 나타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일단 시간이 멈추면 빛도 멈추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된다. 한편으로는, 본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무언가를 ‘인식’하는 것이고, ‘인식’은 시간을 전제로 하여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멈추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감은 물론 의식도 전혀 작동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멈춘 상황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시간이 멈췄다가 다시 흐른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이를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멈추는 일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생명체(더 정확하게는 인식능력이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무의미하다.


원자는 중성자, 양성자 등으로 이루어진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가 대형 월드컵 경기장 정도의 크기라면, 원자핵은 축구공 정도의 크기이다. 즉, 원자는 거의 텅 비었다. 중성자와 양성자는 쿼크라는 입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쿼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우리가 인식하는 물질은 사실은 거의 텅 빈 상태이고, (쿼크 및 그 보다 작은 단위의 입자들의 실체를 끝까지 파헤쳐 보면) 어쩌면 완전히 텅 빈 상태일지도 모른다. 전자 등이 매우 빠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하는 물질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시간이 멈춘다면 전자 등의 움직임도 멈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의 또는 모든 물질이 사라진 텅 빈 상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 멈추면 텅 빈 공간과 어둠만이 남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없으면 공간 또한 있을 수 없다. 즉, 시간이 멈추면 공간도 사라질 것이다.


시간이 멈추면 그야말로 ‘모든 것이 사라진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라고 표현은 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인식하거나 상상할 수 없다. ‘루트 -2’ 같은 허수를 표시할 수는 있지만, 사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우리는(혹은 나는) 정말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떠올릴 수 없다. 그것은 아무런 빛도 없는 텅 빈 공간과도 전혀 다르다. 점 하나만 있는 그런 상태도 아니다(그런데 우리는 점 하나만 있는 상태도 떠올릴 수 없다. 아무런 공간도 없이 오로지 점만 딱 하나 있는 장면은 아무리 애를 써도 머릿속에 그릴 수 없다).


즉, 시간이 멈추면 공간도 모두 사라지는데, 우리는 그러한 상태를 떠올릴 수 없다. 타면으로는, 공간 없이 시간만 존재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시간과 공간은 불가분이다. 시간과 공간을 합한 ‘시공’이라는 단어는 매우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2. 의식


그런데 시공은 실재하는 것일까. 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시공이 실재하는지, 아니면 의식 속에만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관념론(이론적이건 실천적이건, 관념 또는 관념적인 것을 실재적 또는 물질적인 것보다 우선으로 보는 입장)은 대체로 시공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입장으로 이어지고, 유물론(물질을 제1차적·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설)은 대체로 시공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입장으로 이어진다(이상은 네이버 철학사전을 참조하였습니다).


시공이 실재하는지 여부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시공을 인식하는 의식이 있음은 거의 분명하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 안다.


시공 및 시공을 기반으로 한 에너지와 물질들이 실재하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존재’하고 그 존재를 인식하는 ‘의식’이 있음은 거의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시간과 공간이 불가분인 것처럼, 존재와 의식도 불가분이라고 생각한다.


얼핏, 존재만 있고 의식은 없는 상태도 가능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빅뱅 이후 우주에 생명체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무언가 존재는 하지만 이를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생명체 출현 이후에도, 개별적인 의식들의 협소함에 비추어 의식이 미치지 않는 존재도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일단, 관념적으로 보면 의식을 벗어난 존재는 무의미하다. 그렇지만 관념적으로 무의미하더라도 존재는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에 대하여 나는,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존재들은 인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의식을 벗어난 존재는 없다고 본다. 빅뱅의 순간은 아직까지도 온 우주에 남아 있고,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가능성도 있다. 몇백년 전의 사람이 한 몸짓 하나도, 우리가 현재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의식 없는 존재는 있을 수 없고, 존재 없는 의식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즉, 존재와 의식은 불가분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의식은 존재에 포함되는 개념일 수도 있겠다.


3. 이유


존재와 의식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태초에 갑자기 존재와 의식이 생겨난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태초’라는 표현은 직선적 시간관을 전제로 한 표현인 것 같다. 직선적 시간관과 대비되는 원형적 시간관에 기초하여 보면, 태초라는 것은 없거나 무의미할 것이다.


2015 10 4


Posted by ma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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