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문제에 관한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었다. 나는 이 작업(?)을 계속 미루었는데, 이는 생각을 제대로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이 문제는 스케일이 너무 크다. 그리고 나는 아직 내 내면의 에너지가 회복되지 않았다고도 생각했다. 지금도 그러하다. 무언가 완결성을 갖춘 생각의 덩어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나는 이제 완결성을 포기했다. 그냥 소소하게(?) 나름대로의 생각을 간략히(?) 써보고자 한다. 틀려도 좋을. (쓸 데 없이 서설이 길다는 게 나의 문제이긴 하다.)


□ 일자리 문제의 본질


나는 먼저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일자리는 왜 있어야 할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아실현을 하거나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생각은 넣어두어도 좋다. 임금노동자로서 일을 하는 한 이는 불가능하다. 과연 내가 돈을 받지 않고도 고용주를 위해 일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 간단명료하게 답을 얻을 수 있다.


일자리는 돈을 벌기 위해 있는 것이므로, 일자리는 결국 돈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이다. 그러면 돈은 그 자체로 목적일까. 그렇지 않다. 돈은 재화와 서비스를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재화와 서비스이다.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인가, 당연한 이야기를 굳이 왜 이렇게 어렵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정리하고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문단에서 말한 내용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일자리 → 돈 → 재화, 서비스


일자리는 돈 및 재화, 서비스와 직결된다. 그러므로 일자리 문제를 돈 및 재화, 서비스의 문제와 떼어놓고 논해서는 안 된다. 일자리 문제에 관한 논의가 자꾸 꼬이는 것은, 이와 연결되는 문제들을 뚝 떼어놓고 국소적인(?) 논의만을 되풀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자리 문제만을 놓고 본다면 오로지 일자리의 부족만이 문제된다. 그 해결책은 오로지 일자리를 늘리는 것뿐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일자리 문제에 관한 논의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일자리를 늘릴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에 국한되어 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설마 당신은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야?”라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맞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재화와 서비스이다.


우리는 일자리보다 재화와 서비스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것이므로. 특히 내가 주목하는 것은 재화와 서비스의 총량이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존재했었고 존재하고 있고 존재할) 재화와 서비스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모두가 누리기에 부족할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이다. 우리 사회에 재화와 서비스는 남아돈다. 누군가는 이것을 지나치게 많이 향유하고, 다른 누군가는 지나친 결핍을 겪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즉, 재화와 서비스의 분배 문제가 있을 뿐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재화와 서비스의 분배가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의 중심에는 노동, 즉 일자리가 있다. 일을 한 대가로 돈을 받(고 이로써 재화와 서비스를 획득한다)는다는 관념이 보편화되어 있다. 이러한 관념 때문에 일자리 문제만이 독립적으로 떨어져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이 곧 사회의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으로 직결되는 시대에는, 그러니까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에 인간의 노동 외의 다른 것이 기여하는 역할이 미미했던 시대에는, 쉽게 말하면 근대 이전의 시대에는, 이러한 관념이 보편타당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고 계속 바뀌어가고 있다. 기계제 대공업이 진작에 발전했었고 인공지능도 기하급수적으로 발달해가고 있다. 인간 없이, 또는 인간의 노동량보다 훨씬 증폭된 양의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된다.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때 필요한 인간의 노동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필연적이다.


현재의 상황은, 사회 전체적으로 일자리는 부족한데 재화와 서비스는 넘쳐나는 상황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재화와 서비스이다. 일자리는 사람들에게 재화와 서비스를 분배하는 매개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인식될 뿐이다. 지금과 같은 분배 메커니즘(주로 임금노동을 통해 재화와 서비스가 분배되는 구조)이 계속 유지된다면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기계와 인공지능 등의 발달로 인하여 인간 노동에 대한 수요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므로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시장의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다. 10명만 있어도 충분히 운영되는 회사에게 국가와 사회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며 5명을 더 고용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 일자리를 늘리는 방법


일자리는 인위적으로 늘려야 한다. 자연스럽게는 늘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시장을 더 자유롭게 둠으로써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잘못되었다. 시장을 자유롭게 두면 오히려 일자리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일자리를 늘리려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어야 한다. 케인즈의 일반이론, 루즈벨트의 뉴딜정책, 수정자본주의 등을 떠올리면 된다.


나는 수정자본주의적 정책이 현재에도 매우 유용하고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무렵 전 세계적으로 수정자본주의 기조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 기조가 패권을 잡았다. 이는 크게 스태그플레이션(물가와 실업률이 함께 오르는 현상을 말한다. 이전에는 보통 물가가 오르면 실업률은 낮아졌다. 경기가 활성화되면 물가도 오르고 일자리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때문이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수정자본주의 자체에 내재하는 문제 때문에 스태그플레이션, 영국병(영국은 1970년대에 저효율, 고임금 현상을 겪고, 독일, 일본 등에 비해 경제가 침체되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 또한 영국의 수정자본주의적 정책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등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한다. 1970년대 세계 경제위기는 오일쇼크(산유국들의 모임인 OPEC에서 갑자기 석유가격을 대폭으로 올린 사건) 등 외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 수정자본주의를 제치고 신자유주의가 대두한 것은 (주로 자본가들의) 힘의 논리에 의하여서였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공공기관의 일자리를 늘리고 공공사업을 늘리며 중소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의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늘, 그러면 그 많은 경비를 어떻게 충당할 것이냐는 반론이 있다. 이러한 반론에 대한 반박을 해보면, 나는 먼저 ‘돈’이라는 개념의 허구성과 모호함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돈이 돈으로서의 가치를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돈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공통적인 믿음이 없다면 돈은 그저 휴지조각이나 숫자에 불과하다. 갑자기 웬 쌩뚱맞은 얘기를 하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매우 본질적이고도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본질을 놓치기 때문에 엄청난 노력을 들이고도 성과를 내지 못하고 혼란만 거듭하는 경우가 많다.


경비 또는 세금에만 주목하는 것은 허구적인 개념에 잘못 현혹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재화와 서비스이다. 공공기관의 일자리, 공공사업 등이 늘어나면 우리 사회의 재화와 서비스 역시 늘어난다. 인위적으로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결코 헛짓이 아니다. 그렇게 늘어난 일자리로 인하여 늘어난 재화와 서비스를 어떻게 분배할지의 문제가 남을 뿐이다.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 분배 메커니즘을 바꾸는 방법


그런데 나는 인위적으로 일자리를 늘리는 것보다는 분배 메커니즘 자체를 바꾸는 것이 더 궁극적이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즉, 일을 하지 않아도 재화와 서비스를 향유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간단명료하게 도출되는 결론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현재 우리 사회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량은 적은데 재화와 서비스는 넘쳐나고 있는 상황이다. 노동을 매개로 하여 재화와 서비스를 분배하는 구조를 언제까지나 지속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을 하지 않아도 재화와 서비스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 기본소득제를 생각하면 된다. 국가가 모든 국민들에게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일정한 돈을 지급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정서적인 반발감을 갖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을 한 대가로 임금을 받고 이로써 생계를 꾸리고 가정을 건사하는 것을 신성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여기서 또 엉뚱해 보이는 이야기를 하겠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것으로 인하여 이익을 얻는 자 또는 집단이 누구인지, 반대로 불이익을 얻는 자 또는 집단은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량은 적은데 재화와 서비스는 넘쳐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주로 노동을 매개로 하여 재화와 서비스가 분배되는 현재의 분배 메커니즘이 계속 유지되면 이익을 얻는 집단은 누구일까. 반대로 불이익을 얻는 집단은 누구일까. 이익을 얻는 집단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들이다. 그리고 불이익을 얻는 집단은 자본가들에게 고용되어 그들에게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들이다. 자본가들로부터 임금을 받아 생활을 꾸려가야 하는 노동자들은 적은 일자리를 두고 서로 간에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웃음 짓는 자들은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슈퍼갑이 된다.


노동을 신성시하는 정서는 자본가들의 이익에 부합한다. 노동자들의 이익에는 배치된다. 자본가들이 노동을 신성시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스스로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반면 노동자들이 노동을 신성시하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비합리적이다. 스스로에게 불이익이 되는 정서를 옹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기본소득제에 대한 정서적인 반발감은 일반적으로 자본가들의 이익에 부합하고 노동자들의 이익에는 배치된다. 사실 이에 관하여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지만, 이야기의 큰 줄기에서는 벗어나기 때문에 이쯤에서 정리하겠다.


기본소득제에 대한 더 강력한 반론은, 그러면 누가 일을 하려고 하겠냐는 것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을 받으면, 즉 재화와 서비스를 향유할 수 있으면, 사람들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회에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이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라는 반론이다. 매우 일리 있는 반론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반론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반박은, 기본소득 이상의 소득을 얻고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향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기본소득 외의 추가소득을 얻기 위해 일을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회에 노동을 제공하고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에 기여할 것이다. 즉,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은 기본소득제 하에서도 충분히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반박은, 기본소득으로 인하여 촉진되는 소비의 증가가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에 꽤 많은 기여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산업화 이후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늘 공급과잉이 문제되었다. 사람들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는 것이 문제였다. 일찍이 서구사회의 국가들은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식민지를 개척하였고, 서로 더 많은 식민지를 차지하려고 대립하다가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인류사의 커다란 불상사까지 겪었다. 즉, 현재 우리 사회는 전체적으로 보면 언제나 재화와 서비스의 부족이 아니라 과잉이 문제되고 있다. 기본소득제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소득제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은 그 많은 재원을 어떻게 충당하냐는 것이다. 사실 이에 대한 답은 앞에서 이미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돈은 허구성과 모호성이 강한 개념이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재화와 서비스이다. 우리는 사회 전체적으로 재화와 서비스는 넘쳐나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돈은 없는, 즉 많은 사람들의 가처분 소득은 매우 적은 상황을 겪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돈이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몰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호하고도 허구적인 이 돈 때문에 경제상황이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 정리


정리해 보면, 나는 일자리 문제는 궁극적으로 분배 메커니즘을 바꿈으로써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즉,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고도 재화와 서비스를 향유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번에 사회의 구조를 바꾸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전 단계로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여 인위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분배 메커니즘을 바꾸는 일이든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이든, 이에는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한 마디를 덧붙이면, 국가, 즉 정부의 역할을 크게 하는 것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고 누구에게 불이익이 되는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2017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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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문제는 크게 경우의 수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중국의 반발에 근거가 있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중국의 반발에 근거가 없는 경우이다. 애매한 제3의 경우가 있을 수도 있지만 사실상 상정하기 어렵다. 첫 번째 경우, 즉 중국의 반발에 근거가 있는 경우를 A라고 칭하겠다. 두 번째 경우, 즉 중국의 반발에 근거가 없는 경우를 B라고 칭하겠다.


A의 경우는 실제로 사드가 중국에게 위협이 되거나 불이익을 주는 경우이다. 만일 사실관계가 A로 판명된다면 문제의 구조가 매우 명확해 질 것이다. 한국에의 사드 배치는 미국이 원하는 것이고 미국에게 이익을 줄 것이며, 중국은 원하지 않고 중국에게 불이익이 된다. 즉, 한국이 미국과 중국 중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의 문제가 남게 된다.


B의 경우는 실제로 사드가 중국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불이익을 주지도 않는 경우이다. 그런데 사실관계가 B에 해당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B의 경우라면 중국은 지금 큰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다. 중국은 사드가 중국에게 위협이 되고 불이익을 준다고 판단하고, 한국에 경제적 제재를 가하는 등 한국에 대한 보복을 진행하고 있다. 만일 중국이 착각에 빠져서 이런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중국은 매우 무능한 것이다. 중국의 정보력과 판단력이 매우 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중국은 현재 어마어마한 강대국이고 정보력과 정책적 판단력 또한 엄청나리라고 본다. 그렇지만 혹시 모르니 B의 경우에 관하여도 논해 보겠다.
B는 다시 경우의 수를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A의 경우와 결론적으로 같아지는 경우, 즉 한국이 미국과 중국 중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의 문제로 귀착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를 B-1이라고 칭하겠다. 그러한 문제로 귀착되지 않는 경우를 B-2라고 칭하겠다.
B-1은 중국을 착각으로부터 일깨우지 못하거나 중국의 고집을 꺾지 못하는 경우이다. 중국은 자신이 착각에 빠졌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더라도 태도를 바꾸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B-1의 경우라면 사실관계가 어떻게 되든 중국은 한국에의 사드 배치를 계속 반대하고 한국에 대한 보복을 계속 진행할 것이고, A의 경우와 같은 문제가 남게 된다.
B-2는 중국을 착각으로부터 일깨우고 중국의 고집까지 꺾는 경우이다. 이렇게 하려면 한국은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한다. 일단 사드가 왜 중국에 위협이 되지 않고 불이익을 주지 않는지를 매우 상세하게 연구하고 분석해야 할뿐더러 이를 중국에게 아주 잘 설명해야 한다. 또한 온갖 정치외교적 전략을 총동원하여 중국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거나 중국의 고집을 꺾어야 한다. 만일 성공한다면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결과에 이를 수 있다. 즉, 한국이 중국과 미국 둘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 정부의 태도를 보면 한국은 B-2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그렇게 보기에는 지금 한국 정부는 너무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사드가 왜 중국에 위협이 되지 않고 불이익을 주지 않는지에 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 놓지 못하고 있고, 중국에 대하여 별다른 정치외교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 같아보이지도 않는다. 즉, 현재 한국 정부는 매우 무능해 보인다. 심지어 한국 정부와 언론은 중국의 도덕성을 탓하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다. 국가 간의 관계는 주로 정치적인 힘의 논리와 경제적인 이익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국제사회에서 도덕성의 잣대를 가지고 어떠한 문제가 논해지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북한의 인권 문제, 무슬림의 할례 문제 등 누구든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는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이러한 경우 대개 강자들이 우월적인 시선으로 약자를 바라보는 형태이다). 사드 문제는 군사적인 문제이고 정치적으로 매우 첨예하고 민감하게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문제이다(강자들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도덕성의 잣대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즉, 현재 한국 정부와 언론의 태도는 매우 이상해 보이기까지 한다.


B-2를 제외하면 한국이 미국과 중국 중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의 문제가 남게 된다. 그런데 나는 B-2는 매우 가능성이 낮은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결국 문제는 한국이 미국과 중국 중 누구를 택할 것인지로 귀착된다고 본다. 한국이 미국을 택한다면, 즉 사드 배치를 강행한다면, 중국으로부터 계속 정치경제적 보복을 당할 것이다. 한국이 중국을 택한다면, 즉 사드 배치를 철회한다면, 미국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것이다. 즉, 한국은 어떠한 경우든 불이익을 얻게 된다. 두 가지 관점에서 해결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이익형량의 관점이다. 어떠한 경우가 한국에게 더 이익인지 혹은 불이익인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명분의 관점이다. 어떠한 경우를 택하는 것이 한국에게 더 그럴듯한 명분을 줄 수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첫 번째 관점, 즉 이익형량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은 현재 중국의 보복보다 미국의 보복을 더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경제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한국은 미국에 아주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로써 곧 한국은 미국을 선택해야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현재의 상황을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변화까지도 예측하고 고려해야 한다. 중국은 지금 미국에 비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강대해지고 있다. 향후 한국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미국에 대한 의존도보다 높아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현재로서는 이익형량의 관점에서는 명료한 결론을 도출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관점, 즉 명분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역시 명료한 결론을 도출하기는 어렵지만 결론적으로는 중국의 편을 드는 것에 더 그럴듯한 명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중국은 한국에 대한 보복에 착수해 있고 실제로 한국은 경제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 한국은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대하여 미국에 호소하며 사드 문제를 다시 논의하자고 간청할 수 있다. 반대로 한국이 미국의 편을 든다면 딱히 중국에게 둘러댈 수 있는 그럴듯한 핑계거리가 없다. 한국이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에 사드를 배치하게 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한국에 어떠한 보복을 가할 것이므로 한국은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드 배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중국에 대하여 큰 호소력이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현재 미국이 한국에 대하여 어떠한 제재나 위협을 가하거나 정치경제적인 경고를 하는 등의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미국은 현재 중국의 한국에 대한 보복을 비판하고 있는데, 만일 한국이 입장을 바꾸어 중국의 편을 든다고 하여 미국이 한국에 보복을 가한다면, 이는 미국이 스스로의 위신을 깎는 결과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이 중국의 편을 드는 것으로 입장을 바꾸었을 때 미국이 곧바로 한국에게 보복을 가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정리해 보면, 사드 문제는 결국 한국이 중국과 미국 중 누구를 택할 것인지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중국과 미국 둘 모두를 잡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 현재 한국 정부는 너무 무능해 보이고 그것이 실현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다. 한국이 중국과 미국 중 누구를 택할 것인지의 문제는 두 가지 관점, 즉 이익형량의 관점 및 명분의 관점으로 각각 접근해 볼 수 있다. 현재로서는 이익형량의 관점에서의 결론을 도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명분의 관점에서는 중국을 택하는 것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지금 미국은 중국의 한국에 대한 보복을 비판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명분의 관점에서 한국에게 사드 배치를 철회할 요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미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증가됨에 따라 한국에 사드를 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군사전문가가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언뜻 생각했을 때 사드는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인데, 북한이 바로 옆에 있는 남한을 공격할 때 굳이 높은 고도로 미사일을 쏠 것 같지는 않다. 즉, 사드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것 같은 느낌도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한국에게는 명분이 있으니 한국 정부가 미국에게 사드 배치 문제를 다시 논의해 보자고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7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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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수 없다

우주 2017. 3. 12. 16:31

글을 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살아오면서 문득문득, 글을 써야겠다는, 더 정확히는 무언가를 밖으로 표현해야겠다는 의지나 욕구가 생기곤 하였다.
그 의지나 욕구가 게으름을 압도할 때 나는 글을 썼던 것 같다.
나는 지금 그런 의지나 욕구가 없다. 요 근래에는 계속 없었고, 이렇게 오래도록 없었던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그리고, 그래서. 지금 쓰고 있는 이것은 사실은 글이 아니다.
예전에도 나는, 내가 쓰는 것에 감히 '글'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어서, '글 같은 것'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나는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다.
글을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책도 거의 읽지 못하고 있다.
수동적으로 있어도 주어지는 자극과 정보들에 휩쓸리면서 넋을 놓고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짧은 한탄을 해 본다.


2016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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